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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때도 싸우는 소설가 -홍성원의 「남도기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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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때도 싸우는 소설가 -홍성원의 「남도기행」

비평쟁이 괴리 2022. 6. 29. 11:38

남도 기행은 서울 낚시꾼의 행복한 방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방면은 물론 석방의 다른 말이다. 그는 Y시의 남녘 바다에 바다낚시를 감으로써, “대도시의 진구렁에서 방면되곤 한다. 그러나 방면은 탈출과 다른 말이다. 탈출과 달리 방면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다. 작가가 굳이 이 생경한 한자어를 쓴 까닭은, 서울 낚시꾼이 여전히 서울의 감시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일까? 과연 그는 바다에 와서도 서울의 표지를 떼어낼 수 없으며, 때가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그의 풀려남은 한시적이고 속박적인 것이다. 방면은, 따라서 해방이 아니라 해방에 대한 강박관념, 해방에 대한 열망과 절망이 뒤엉킨 감정의 덩어리를 지시한다.

그러나 서울 낚시꾼의 방면은 그가 준비하고 실행한 방면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방면의 주체는 이 세상이지만, 작품 안에서는 그가 주체라는 것이다. 방면은 그가 만든 공간이다. 과연 우리는 동음이의의 또 하나의 방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Y시 방면이라고 말할 때의 방면은 모호한 넓이를 가진 지역을 가리킨다. 그 공간의 모호성은 미정형성과 동의어이다.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서울 낚시꾼 그 자신이다. 그는 방면의 장소 즉 강박의 장소를 상상의 장소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 강박상상의 장소에서 그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가 우선 본 것은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로 훼손된 바다의 실상이다. 세상은 이미 이 난바다마저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음으로 본 것은 실상을 은폐하고 가상을 선전하는 현대사회의 막강하고 무분별한 정보 그물이다. 세상은 폭력의 주체일 뿐 아니라 기만의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역겹고 끔찍한세상에 대해 그 나름의 저항을 하는 인물들이다. 그에게 뱃길을 안내하는 김씨와 그가 그 행적을 답사하는 이순신이 그들이다. 그들의 행동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틀조차 허용하지 않는 시대적 상황과의 싸움인 탓에 자기 방기로 드러난다. 그것은 왜 불가피한 선택이 되지 않을 수 없는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작품은 서울낚시꾼과 마찬가지로 방면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독-우리를 그 고통스런 질문 속으로 몰아넣는다.

 

- 1994, 94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현대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