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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전체로 말하기 - 홍성원의 『달과 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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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전체로 말하기 - 홍성원의 『달과 칼』

비평쟁이 괴리 2022. 6. 23. 12:40

달과 칼(한양출판, 1993)의 작가는 몸 전체로 말한다. 이 말은 한갓 수사가 아니다. 몸으로 말한다 함은 삶의 구체성 속에서 언어가 솟아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작품의 시간적 무대는 임진왜란이다. 작가가 그리는 것은, 그러나, 장군들의 활약도, 외적을 물리친 조선 백성의 기개도 아니다. 모든 수난과 싸움과 승리가 어떠한 이념으로부터도 주조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생활사를 재구성한다. 그는 수난을 말하되 나라의 수난이 아닌 제 각각의 수난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싸움을 그리되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을 치러내는 고통 속으로 진입하며, 승리를 말하되 군사력의 승리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익힌 지식과 지혜가 어우러져 일구어낸 삶의 승리를 보여준다.

 

임진왜란이 민족의 수난이자 깨달음의 계기라는 작가의 전언은 바로 거기에서 근거를 구한다. 왜의 침략은 한반도 전체를 문드려뜨렸으나, 그와 함께 적의 침략을 그렇게 방치한 썩은 정신, 헛된 관념들도 동시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태어났으니, 반상의 구분이 무너지고 평등의 정신이 태어났으며, 예학이 쓸모를 잃고 잡학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니, 작가는 태어났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본래 몸의 길은 한없이 긴 것이어서, 작가는 그 길의 초입이 막 생겨나는 혼란스럽고 부산한 과정을 침착하게 그려보일 뿐이다.

 

작품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몸 전체로 말한다 함은 문체를 두고 한 말이다. 홍성원 문체의 특징은 묵직하고 단단하다는 것이다. 디테일은 정확하나 자잘하지 않으며 인물들의 형상은 또렷하되 경계가 없다. 작가는 하나의 풍경, 하나의 인물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가 묘사하는 것은 차라리 조선의 대지 자체이다. 아니, 묘사한다는 말은 부적절하다. 그의 언어는 진창 속의 수레를 어깨로 밀고 가는 역사(力士)처럼, 삶을 떠메고 간다. 그것은 사건과 자연과 사람을 한데 묶어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그 속에서 자연은 풍경이 아니라 삶의 살아 있는 터전이고, 인물은 개인이 아니라 삶이 차돌처럼 여물은 때를 표상한다.

 

그로부터 달과 칼의 두 가지 미묘한 현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그 무수한 사건들 속에 간계와 배반이 없다는 것이다.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으나 소위 더티 플레이는 없다. 물론, 이순신이 받은 모략도 있고 의병을 가장한 도적 무리도 출몰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배면에 깔려 있을 뿐이다. 그 음침한 바탕과 대조되어 다부진 삶의 몸짓들이 더욱 도드라져 움직인다. 다른 하나는, 대화의 말씨에 방언이 없다는 것이다. 팔도의 모든 인물들이, 양반과 상민과 천민이 모두 하나의 말씨를 쓴다.

 

교과서적인 소설 작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두 가지 현상은 결함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과 칼에서는 그것이 맞춤하다. 바로, 공간 전체를 끌고 가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그 언어, 곧 대지가 움직이는 방향 저편에 둥글어가는 달이 떠 있다. 그 달은 기울면 찬다는 의미에서의 달이다. 달은 기울수록 속으로 차고, 칼은 빛날수록 밖으로 허망하다. 그것은 작가가 삶의 내재성을, 즉 사람과 세상의 일치를 근원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지극한 고전적 정신의 소유자다.

 

󰏔 1993. 2. 24, 한국일보, 몸 전체로 말한 壬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