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오토픽션' 현상에 대한 짧은 생각 본문

사막의 글

'오토픽션' 현상에 대한 짧은 생각

비평쟁이 괴리 2021. 7. 23. 08:38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2회 2021년 7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전반적 인상

 

작가 자신과 주변에 대한 고백적 글쓰기가 일종의 유행처럼 퍼진 게 상당히 오래 되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터지고는 한다. 이런 현상을 보다가 문득 프랑스의 한 작가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때 신비평의 맹장이자 사르트리엥Sartrien이었던 세르쥬 두브롭스키Serge Doubrobsky1980년대 말년부터 소설가의 길을 걸었는데, 높은 평가를 받아서, ‘메디치 상을 비롯 유수한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한데, 그는 자기허구 autofiction’라는 용어의 창안자로 문학사에 등록되었다. 동아시아권에선 일본에서 사소설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고 한국에서도 자못 유행하기도 하지만, 서양문학에선 지극히 낯선, 이 장르를 그가 개시한 것은, 17세기 극작가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와 사르트르와의 상호텍스트적 연관성을 찾는 도중에, 거기에서 자기 폭로의 경향을 보았던 데서 비롯되었다(자전적이라는 것들 - 코르네이유에서 사르트르까지 Autobiographiques: de Corneille à Sartr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8.)

필자가 고백에서 폭로로 용어를 바꾸는 데 주목을 할 분이 있을 것이다. 실로 두브롭스키가 글쓰기를 통해 발견할 자기는 잡다한 생활적 사실들을 넣었다가 버리곤 하는 일상적 자아가 아니라, 스스로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괴물이었다. 바로 이 라는 존재의 불가해성으로 인하여 탐구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그가 오토픽션이라는 명명을 처음 부여했던 아들 혹은 끈들 Fils의 초고는 무려 9,000 장의 수고본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오토픽션이 자신의 괴물성을 파고들 때, 그것은 문학적 사실이 되는 데 비해, 신변잡기의 주유(周遊)가 될 때에는 사생활의 이불 속을 들춰내는 사회적 사안이 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 사회적 자아이든 괴물스런 자아이든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허구임이 전제된 소설에서 왜 자신의 신상을 터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끈덕지게 질문을 던지는 일일 터이다. 그 질문이 결여되면, 이는 꼭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글읽기에도 해당하는 문제인데, 그런 오토픽션은 그냥 가십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