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장-뤽 낭시의 영면 본문

사막의 글

장-뤽 낭시의 영면

비평쟁이 괴리 2021. 8. 26. 11:15

프랑스의 김순기 화백으로부터 장-뤽 낭시(Jean-Luc Nancy)823일 돌아가셨다는 메일을 받았다. 1940년생이시니, 81세에 생을 마감하신 셈이다. 슬픈 일이다. 그는 대중적으로 이해되기가 어려웠으나, 높은 수준의 사고력으로 세계의 문제와 향방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내놓았다. 생각나는 대로 적자면,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통해서 철학사 혹은 인간 정신의 역사에 오랫동안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할 것이다.

▶ 필립 라쿠-라바르트 Philippe Lacoue-Labarthe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 지적 사유에 있어서 협업의 효능을 입증하였다.

이 공동작업의 결과로서, 라깡의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에 대한 독해의 결과인 표제로서의 문자Le titre de la lettre(1973)(이 저서 제목은 번역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그 까다로움은 이 제목이 복잡한 함의를 담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저자들은 그 사실을 서문에서 불충분한 진술로 암시하고 있다)를 첫 번째 저서로 내놓았다.

역시 공동 작업의 결과로서, 문학적 절대 혹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 이론 L'absolu littéaire: Théorie de la littéature du romantisme allemand(1978)을 내놓아, 서정시 탄생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해명하였다.

수다한 단독 저서도 있는데, 그 중, 이만형과 내가 공역한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2003) (번역서는 2015년에 출간되었다.)는 예수의 부활의 신비를 다룬 것으로서, ‘거듭 남에 관여할 의 기능과 존재태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후반기의 작업은 공동체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었다. 내가 보기에 그가 이 일에 투신한 것은 공산주의의 오류를 넘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기 위해서였다. 이 탐구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는 무위의 공동체 La communauté désoeuvrée(1999)일 것이다.

 

그 밖에 기억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는 말년에 라쿠-라바르트와 공혼(共婚: 부부생활을 함께 하는 것)을 실험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실험은 실패한 것 같다. 라쿠-라바르트와의 우정도 그 지점에서 많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모색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서 설정하고 모든 수단을 통해서 추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낭시, 데리다, 김순기 화백, -미셀 라바테 Jean-Michel Rabaté는 일정한 우정을 맺었다. 내가 읽기에, 데리다, 낭시, 김순기는 각각 추구한 바는 달랐지만, 사고의 틀을 깨뜨려 인간 정신을 해방시킬 길의 모색과 그 실험(혹은 실천)에서 동행하고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이 역시 내가 읽기에, -미셸 라바테는 이런 모색에 대한 가장 명료한 해석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낭시와 라쿠-라바르트 이 두 분을 꼭 만나고 싶었는데, 무엇보다도 내가 추구하는 사고 구조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쿠-라바르트 선생은 음주과다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2007), 낭시 선생은 연로하신 상태에서 내가 프랑스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뵙지를 못했다. (부연하자면, 나를 만지지 마라번역본이 출간되었을 때, 낭시 선생이 김순기 화백으로부터 번역에 관해 얘기를 들었다면서 고맙다는 내용의 메일을 내게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고 낭시 선생을 한국에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추진하기에는 내 능력이 충분치 않았고, 그 다음에는 프랑스에 갈 기회가 생기면 인사 드리러 갈 마음을 품었었는데, 그것도 역시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냥 마음이 허전하고 허전하다. 낭시 선생의 명복을 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낭시의 부음 기사를 르 몽드 Le Monde지면에서 볼 수가 없다. 인터넷 판에는 824일자로 플로랑 조르쥬스코Florent Georgesco가 쓴 기사가 떴는데...? 826일자 종이 지면은 롤링 스톤스의 드러머 찰리 왓츠Charlie Watts의 부음을 1면에 소개하고, ‘문화면’ 1페이지를 통해 그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낭시 선생에 대한 기사는 서평Livres’란에서 내놓을 예정인가? 그러면 금요일?

※ 얼굴 사진은 wikipedia에서 구한 것으로 CC-BY-S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Share-Alike license)에 속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