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

비평쟁이 괴리 2020. 9. 3. 02:53

이 글은 20208월 동인문학상 독회에 제출된 의견 중 일부분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이 글은 함께 실린 8월 독회 의견 전체, 특히 전반적 인상’(20208월의 한국문학, 바람 서늘)을 참조하면서 읽을 때, 그 의미를 좀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멜라의 적어도 두 번(자음과 모음, 2020.07)은 사회화될 수 없는 성소수자들(여러가지 양상으로서의)에 관한 소설들이다. 이들은 교섭불능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시몬느 드 보브와르가 말했던 그 유명한 여자에 대한 정의처럼. 작가는 그 점을 자기가 뭔지 모르겠을 땐 숫자나 과일이나 색으로 비유해보면 알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를 다른 것에 비유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말로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 소수자들의 고통스런 질문은 두 방향으로 뻗는다. 하나는 비유로서만 존재하는 소수자의 정체성은 가능한가? 라는 것이다. 주인물은 어린 왕자를 참조하면서 그 물음을 더듬거리며 전진시킨다. 다른 하나는 소수자와 소위 정상인들사이의 소통은 가능한가, 라는 물음이다. 작품들은 내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존적으로확인한다. 가령,

 

나는 정말이지 원숭이나 버섯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집 거실에는 컴퓨터가 있고 나는 불법 사이트에 우회 접속하는 방법을 알지만 내가 보고 싶은 건 남자가 여자 위에 올라타 여자 를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뭘 보고 싶은지 몰랐다.

 

특정한 성 형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성적 형성이 다른 존재들 사이의 교류는 말 그대로 불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불법적 경로는 지배자들의 돈을 채우기 위한 방식으로 집요히 상품화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 유통망 속에서 진정한 소통의 모색은 항상 좌절과 실패와 상처의 양태로만 드러난다.

김멜라의 작품들(이걸 특별히 강조해야 한다. 여기서 독자는 작가를 읽는 게 아니다.)은 비정상으로 간주된 사람들의 고통과 희망을 아주 솔직하고도 대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의 소통을 매우 긍정적인 태도로 꾀한다. 이 작품들의 미래를 기대하게끔 하는 큰 요인이 바로 이 허심탄회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