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권정현의 『미미상(美味傷)』 본문

※ 이 글은 2020년 8월 동인문학상 독회에 제출된 의견 중 일부분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이 글은 함께 실린 8월 독회 의견 전체, 특히 ‘전반적 인상’(「2020년 8월의 한국문학, 바람 서늘), 그리고 지난 달 독회의 ‘전반적 인상’ 부분(「오늘의 한국소설에 대한 인상」)을 참조하면서 읽을 때, 그 의미를 좀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권정현의 『미미상(美味傷)』(나무옆의자, 2020.07)은 실연을 당하고 해골을 주워 집으로 가져와 애인처럼 꾸미고 동숙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애인 집 근처의 놀이터에서 소변을 자주 보곤 하는데, 이는 손창섭의 『낙서족』을 생각키운다. 손창섭에게 오줌은 울분의 배출이라는 뜻을 갖지만 오늘의 주인공에게는 욕망의 실금에 불과하다. 이는 한국인의 감정의 진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감정의 억제가 우울증으로 번지는 사연을 알려준다. 그 우울증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가 해골과의 동숙이다. 해골은 명백히 살아 있는 애인의 대안이고 따라서 여기엔 이념적 대결이 있다. 떠난 애인에 대한 미련은 우울증을 앓는 현대 사회에 대한 위생적인 대안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부터 비롯한다. 위생적인 대안이란 사소한 행복주의에 대한 권유를 가리킨다. 자질구레한 것들에서 적절한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서 행복의 깨알들을 거듭 빻아내면서 일상의 무기력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이 사소한 행복주의는 오늘날 거의 삶의 모든 부면에서 권장되고 있는 일상 철학이다. 『미미상』의 인물은 그러한 행복주의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삶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이 위선이고 상처의 포장(미미상)이라는 느낌을 견딜 수가 없다. 해골은 형해화된 죽음, 뼈다귀로-살아있는-죽음이다. 그것은 그 거짓된 삶에 저항하고자 하는 반작용이다. 삶이 무의미라면 의미는 죽음 편이 아닐까? 그는 해골이 전하는 ‘신호’를 포착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결정적인 장애가 있다. 해골은 행동하지 못한다. 드러나지도 못한다. 그것은 삶의 무의미를 결코 깨뜨릴 수가 없다. 그는 해골을 들여놓고도 변심한 애인을 한시도 잊질 못한다. 윤동주의 시, 「또 다른 고향」이 노래하듯, 해골은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을 하며 “눈물 짓는”다. 백골로는 ‘또 다른 고향’에 갈 수가 없다. 그는 해골을 부순다. 그는 자신이 ‘미미상’의 그물 안에 포박되고 말 것임을 안다. 그는 술집 ‘미미상’에서 이루지 못할 행복에 안달하고, 술집 주인은 마감시간이 되면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온 사람과 사라질 것이다. 사소한 행복주의의 덧없음은 그렇게 무한정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뜻 없는 삶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만 사람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는 싸웠다. 적어도 그는 환상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환상과의 싸움을 아주 천천히 집요하게 이끌고 갔다. 그것이 이 작품의 길이이다. 그 길이를 유지시켜 준 건, ‘차분하고도 꼼꼼한 묘사’이다. 디테일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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