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개는 네 번 짖는다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 본문
※ 아래 글은, 「얼음의 도가니」가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일을 계기로 「문학사상」에 발표한 것이다.
나는 「얼음의 도가니」에 대해서 이미 월평을 쓴 바 있다. 짧은 글이었지만 거기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이야기되었다고 생각한다. 되풀이를 피하는 대신 나는 이 작품의 초두와 말미에 울려 퍼지는 개짖는 소리에 대해 분석, 아니 짧은 지면에 분석의 모든 것을 쏟아넣을 수는 없을 테니 그냥 두어 마디 하고자 한다. 그 두어 마디는 그러나 월평에서 한 얘기의 내용적 보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맨 처음 해석을 조금 수정하게 되었다. 다시 쓴다는 것은 달리 쓴다는 것이다.
내가 개짖는 소리를 분석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것이 이 작품을 열고 비틀고 닫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야기의 차원에서 작품은 주인공 나(-그-임희경)가 진평이라는 겨울 휴양지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그러나, 그 골격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이야기해주는 바가 없다. 그것만 봐서는 안 되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 콘도미니엄의 방을 마련해 준 출판사 사람들도 그곳을 왔다 갔기 때문이며, 또한 ‘나’의 사건은 도착․떠남의 궤적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혹은 그 둘레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의 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출판사 사람들보다 진평에 먼저 와서 나중에 떠나고, 서술의 차원에서 보자면 출판사 사람들은 도착으로부터 떠남까지의 분명한 일정을 보여주는데에 비해 ‘나’에게는 진평에 도착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으며(작품은 진평에서 시작된다, 나는 혹은 소설은 이미 진평에 들어와 있다) 눈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되는 떠나는 장면은 생활공간으로의 되돌아감 이전에 있다. ‘나’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그 눈길 걷기는 차라리 진평에서 그가 쓴 “소설의 말미로 되돌아” 오는 과정이다. 출판사 사람들보다 먼저 와서 늦게 간다는 점에 비추어본다면 ‘나’의 진평 도착․떠남은 출판사 사람들의 도착․떠남을 둘러싸고 있으며, 서술의 차원에서 나의 도착․떠남이 불분명하다는 점에 비추어본다면 그것은 예정된 도착․떠남(출판사 사람들의 도착․떠남이 그 실례를 보여주고 있는)의 시간폭 안쪽에 있다. ‘나’의 도착․떠남은 그들의 도착․떠남보다 넘쳐나거나 모자란다.
출판사 사람들의 진평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비교적 분명하고도 복잡하다. 그것은 진평이 휴양지이자 동시에 회담(그리고 소설쓰기)의 장소라는 이중적 표지에 선명하게 박혀 있다. 신년 간담회를 위해 진평을 방문하였고 ‘나’에게 약속된 소설의 탈고를 위한 장소로서 진평을 제공했던 그들에게 있어서 진평이란 휴식과 노동과 사업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그들의 그곳에선 오늘의 휴식이 미래의 창조적 삶을 위한 자양이 되어주고 그리고 그것은 소비는 낭비가 아니라 생산의 촉매제라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용어가 가능하다면 그곳은 자연 변증법의 공간이다. 왜 변증법이냐 하면 휴식과 노동이라는 대립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있기 때문이며 왜 자연 변증법이냐 하면 그 대립은 자체 내에 변증법적 해소 기제를 가지고 있어서 그 발전적 통일이 ‘당연히’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끊임없이 대립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변화를 촉발하여 영원한 진보의 도정 속에 위치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가 어느 세계인가? 작품 속에서 되풀이되는 용어로 말하자면 ‘일상’이 바로 그곳이다. 다시 말해, 바로 우리의 일반적 생활 공간 그 자체인 것이다. 출판사 사람들의 진평이 분명하고도 복잡하다고 쓴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이 일상을 직접 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간단하지만 그 일상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획일적이거나 파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 내의 활동 역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복잡하다. 최수철의 소설이 복잡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삶은, 아무리 사소한 것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일상적 삶의 장소에 견주어 ‘나’의 진평은 넘치거나 모자란다. 그 넘치거나 모자란 만큼의 모호한 공간이 진평의 일상적 공간의 가두리에 아스름한 달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 달무리진 부분은 ‘나’의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그곳을 흐르는 것은 나의 사건에 대한 나의 정처없는 의식의 변주이다. “온갖 과거의 기억들, 앞날에 대한 두려움, 지금 이 순간의 막막함……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들이 한데 뒤섞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의식이라는 이름의 “끓는 쇳물 속에서 텀벙거”린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텀벙거리는 그 의식의 흐름은 따라서 아무런 방향도 제동장치도 갖지 못한다. 당연히 그 흐름은 한없는 순환만을 가질 뿐, 어떠한 변화도 만날 수 없다. “나는 달라지고 변화하려 했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진 것도, 변화한 것도 없다”고 나의 의식은 고백한다. 이 한없는 순환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개짖는 소리이다. 그것은 이 모호한 의식의 장소를 열고 닫을 뿐 아니라 의식의 혼란에 방향의 구조물을 세운다.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① 작품의 무대는 진평이 아니라 진평 주변이다. 진평이면서 동시에 진평이 빠진 곳. 산술적으로는 진평에서 진평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그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실은 남는 것이다. 진평이되 진평이 아님으로써 갑자기 비어버린 진평에 대해 생각게 하는 곳, 그러니까, 그 진평은, 원이 원의 집합 내에서 보면 반지름과 파이의 곱셈으로 이루어진 충만한 영역이지만 원 아닌 집합에서 보면 그만큼의 결핍이라는 의미에서, 탈-진평의 결핍이다.
② 존재결여는 대자존재라는 의미에서 결핍은 곧 의식의 탄생이다. 그러나 그 의식에 신진대사를 제공하는 것은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의식에 대한 의식이다. 의식에 대한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의식은 일상 속으로 실질적으로 가담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혼란한 기억,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현재의 막막함으로 들끓는 의식은, 의식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기억을 정돈하고 전망과 자세를 이끌어낸다. 의식에 대한 의식은 따라서 의식의 해체․재구성이자 동시에 일상의 해체․재구성이다. 그 의식에 대한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징후이자 사건이 개짖는 소리이다. 개짖는 소리는 그러니까 이야기의 차원을 암시하는 하나의 징조 단위일 뿐 아니라 이야기의 차원을 배반하고 그것을 반성케 하는 징후 차원의 핵 단위이다. 그것은 이야기의 주-기능을 기능 핵자라고 부를 때와 같은 의미로, 그러나 사건과 분위기 사이에는 상동성이 아니라 일탈과 변화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징조-핵자를 이룬다.
「얼음의 도가니」의 개는 플란다스의 개나 라블레의 개와는 다른 개이다. 플란다스의 개가 인간 세상의 삭막함을(그러니까, 개만도 못한 세상을) 운명적 순응을 통해서 쓸쓸히 반성케 하는 개라면, 라블레의 개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정성들여 빨아 “뼈를 쪼개 골수를 마시는” 철학적 개이다. 최수철의 개는 충격의 개이다. 그것은 ‘나’의 의식의 모호한 유동에 급격히 쏟아부어져서 각성을 촉발하는 외침을 지른다. 그 외침이 개의 외침으로 드러난다면, 우선은 그 충격이 배반감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전혀 그럴 줄 몰랐던 굴종의 권화로부터 느닷없는 일격을 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촉발체는 사실 최수철의 소설에서 특이한 것이 아니다. 이 민감한 소설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들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기습적으로 인물의 의식을 찌르고 할퀴어 왔던 것이다. 그 기습적 충격이 개의 비유를 통해 묘사된다는 것도 최수철의 소설에선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개를 써먹은 적이 있다. 그의 데뷔작인 「맹점」에서이다. 「맹점」의 ‘그’는 개성을 갖기 위해 만사에 대해 “개같다”는 말을 내뱉는 것을 그만의 이디올렉트로 삼는데 결국 그것은 정말 개같은 그의 삶을, 그의 삶의 ‘개’성을 비참하게 확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맹점」의 개가 자기 훼손과 비하의 감정에 관계하고 있다면, 그러나 「얼음의 도가니」의 개는 자기 반성에 관계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의 관심이 세계와 자아, 생활과 의식의 가파른 줄다리기로부터 그 줄다리기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결의 결과로부터 대결의 구조로 눈길이 옮겨졌다는 것이다. 아무튼, 아니 그러니, 개짖는 소리가 의식에 대한 의식인 만큼, 그 반성은 ‘나’의 일상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나’의 의식에 대한 반성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 반성은 2차적이다. 2차적이라는 말은 반성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의식에 있었다. 의식은 끊임없이 그의 과거․현재․미래의 삶을 되새기고 가늠하고 떠올리면서 그의 일상을 자책과 회의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 일상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일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나’의 의식은 ‘보호와 감시’라는 주제학으로 구성해낸다. 개가 이 소설의 핵-징조로서 동원되는 또 하나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는 천대받는 존재일 뿐 아니라 조심스럽게 길들여지는 대상이다.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 것은 자칫하면 물리기 때문이다. 길들임의 문제는 이 작품에서 애완견의 길들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나’의 의식이 시간성에 강박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온갖 과거의 기억들에 시달린다. 그 기억의 대부분은 스승과 당국과 아버지의 보호 혹은 감시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 양태는 저마다 다르다. ‘나’의 의식 속에서 당국은 가장 직접적인 간섭자이며 스승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나를 지켜보며, 일찍 자살한 아버지는 보호자의 역할을 외면한다(그 아버지를 두고 ‘나’는 “당신은 교묘하게 당신과 나의 처지를 바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 양태는 저마다 이질적이지만, ‘나’의 의식은 그것들을 보호의 주제학 아래 구성한다. 그뿐이 아니다. 나는 보호받는(받아야 할)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된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오랜 망명 생활로 인하여 돌봐주지 못했던 아들은 ‘나’가 귀국한 후에 어색한 만남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만나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그것은 곧 아버지와 아들의 의절로 소문이 난다. ‘나’의 일상은 결국 지속성을 목표로 하는 보호의 계보학 속에 놓여 있다. 앞에서 말한 자연 변증법은 그 보호의 계보학의 다른 말이다.
나의 의식이 그 일상을 ‘개’와 연관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연 변증법의 세계가 그에게 제도화된 삶, 즉 예정된 종착지를 향해 직행하는 무반성적인 삶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철로’라는 환유체를 얻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일상의 벼랑 한쪽 옆에는 항상 기차의 철로가 깔려 있다. […]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따라 과거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위협하는 과거라는 위기의 벼랑이 죽음의 철로처럼 우리를 동행하고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는 것이다.”
나의 ‘의식’은 바로 그 철로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것이 그의 주체적 선택을 구성한다. 망명, 스승에 대한 의식적 무관심, 자살이라는 아버지의 선택을 거부하기,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내가 너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그가 선택한 것들이다. 여기서 그것들을 자세히 분석할 생각은 없다. 지금의 주제는 ‘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어보자. 그렇다면, 개짖는 소리는 그 제도화된 삶에 대한 거부의 외침인가? “제도 속에 정연하게 배열된 수많은 책상들의 열 한쪽 밖으로 삐쭉이 나와 있는 나의 책상”의 모난 얼굴인가? 혹은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의 잡스런 속담 속의 개의 짖음인가?
아니다. 개짖는 소리는 일상에 대한 부정의 외침이 아니라 일상을 부정한 나의 의식-선택에 대한 각성의 외침이다. 개의 강박관념은 「톰과 제리」의 불독처럼 삶의 아슬아슬함을 단숨에 파투낼 상상폭탄을 터뜨리는 백일몽(불독은 늘 낮잠을 자고 있다)에 시달리지만, 개의 부르짖음은 거꾸로 그 욕구 자체에 뜨거운 물을 뿌리는 드라마를 연출한다. 실로 작품은 삶에 대한 나의 인식 그리고 그것이 낳은 나의 선택이 결국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자각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달라지려 하였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로즈마리와의 육체적 사랑, 스승의 딸인 윤서경에의 정신적 의지 그리고 유폐를 담보로 한 소설쓰기 등등은 결국 타인에게 확인받는 절차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확인이란 결국 타인의 의식의 복제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일상을 부정하는 의식 자체가 일상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동일자의 증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개의 부르짖음은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의 화두에 맞닿으며, 그 대답은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이다.
그게 대답이라고? 실은 그게 아니다. 그 질문은 두 개의 대답을 가지고 있으니, 첫 번째 대답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두 번째 대답은 정반대로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개의 대답은 그냥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개짖는 소리의 변주 자체를 통해 흐름을 갖고 분화한다. 개짖는 소리는 그 자체로서는 짧은 단 한 번의 외침이지만 개짖는 소리들은 소리의 내력을 이룬다.
개는 전부 네 번 짖는다. 서두에서 한 번, 중간의 술자리에서 한 번, 그리고 결말부에서 두 번 짖는다. 실제로 개가 나오는 것은 서두와 결말부의 첫 번째 두 번뿐이며 중간의 개짖는 소리는 “어떤 강력하고 갑작스러운 [환청된] 소리”의 의성어이고, 결말부 두 번째의 소리는 개로 상상된 눈덩이의 소리에 대한 상상이다. 결말부에 개짖는 소리가 두 번 나온다는 것은 개짖는 소리가 두 개의 줄기로 분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동일한 발단과 전개가 모순된 두 개의 결과를 동시에 내놓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였을까? 내력을 따져볼 일이다.
첫 번째 개짖는 소리에서부터 ‘나’의 의식에 대한 각성은 시작한다. 그러나, 그 개짖는 소리는 일상을 부정하는 나의 의식으로부터 거의 자유롭지 못하다. 그 소리는 ‘나’의 의식 속에서 콘도미니엄을 북적대는 온갖 존재들이 내는 다른 잡다한 소리들과 대립한다. 큰-소리는 작은-소리들을 비웃는다. 개짖는 소리는 일상이 내는 작은 소음(騷音)들을 소음(消音)시킨다. 그러나 두 번째 개짖는 소리는 일상의 소음들 한복판으로부터 터져나온다. 사방으로 난무하며 엉키는 대화들, 개똥 같은 인생론, 「톰과 제리」의 종료, 오지 않은 윤서경의 소식 다음에 기자가 그의 정면에서 플래시를 터뜨린다. 그때 “나는 눈앞에서 사진기에 부착된 플래시의 전구가 퍽 터져버리는 것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찰나에 갇힌 음화 속에서 나의 단절된 눈빛이 번뜩 죽음의 허연 뿌리를 드러내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 모습은 어떤 강력하고 갑작스러운 소리처럼 내게로 달려든다. 컹.” 일상으로부터의 급습은 나의 의식과 일상의 동시적 파열을 야기한다. 왜냐면, 나의 의식은 실상 나의 일상과 하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허연 뿌리가 드러나는 자리는 나의 의식의 밑바닥이자 동시에 일상의 밑바닥이다. 그렇다면 거꾸로도 얘기해야 한다. 일상에도 자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절과 죽음과 고뇌가 있다고. 엉키는 대화, 한 포스트 모던한 소설가의 “격앙된 어조”의 자기 옹호와 술취한 또 한 소설가의 개똥 인생론, 스승의 병환… 플래시의 전구를 터져버리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러니까, 자연변증법의 세계란 사실 없다. ‘나’의 의식이 고뇌의 덩어리이면서 하나의 선택을 갈망하듯이, 일상은 예정된 경로를 지나가는 듯하면서 무수한 일탈과 배반의 욕망으로 꿈틀거린다.
결말부에 개짖는 소리가 두 번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나는 ‘나’의 의식-선택에 대한 부정의 외침이다. 그것은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나를 용서할 수가 있다”는 또 하나의 외침이 터진다. 내 의식이 일상이며 내 일상이 의식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끌고 간 그만큼 일상을 인정해야 한다면, 일상을 인정한 그만큼 의식을 긍정해야 한다. 개와의 눈싸움으로 듣게 된 개짖는 소리는 마지막 개짖는 소리에 와서 싸움 의지로 충혈된 눈에 돋아난 실핏줄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실핏줄은 대립의 균열, 막막한 타자로부터 “가늘고 따뜻한” 떨림으로 전해오는 통화의 갈망, 바로 그것의 실증이다. 나를 새하얗게 얼어붙게 하는 죽음의 철로, 즉 과거의 불행한 기억들, 미래의 암담한 전망을 싣고 나에게 몰려오는 철로는, 그때, 더 이상 종착지가 예정된 외줄기의 직선로가 아니라, 두 줄기의, 다시 말해 가고 오는 마음의 교류의 떨림을 은은히 전하는 울림통이 된다. 그 철로는 “붉다”. 다시 말해 생명의 기운으로 약동한다. 그것이 나를 그토록 가두어놓았던 “거대한 빙산을 두 쪽으로” 가른다. 나는 비로소 ‘화해’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화해이다.” 하긴 모두가 화해를 꿈꾼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얘기해서 상투어로 전락한 이 ‘화해’라는 단어가 이 작품에서만큼 절실하게 들리기는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절실한 것은 그 과정의 구체성을 작품이 감각의 전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충혈된 눈은 곧 실핏줄들이 무수히 퍼져나간 눈이라는 것은 화해는 결코 난데없이 밖으로부터 주어지지 않고 싸움의 긴 과정 그 자체로부터 우러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해의 과정이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싸움의 과정과 그대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 기나긴 과정의 촉발체가 된 개가 “긴 의자”에 앉은 “검고 가늘고 긴 머리”의 소녀 곁에서 “길고 붉은” 혀를 늘어뜨리고 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묘사이다. 그 모든 긴 것들은 철로의 암시이며, 철로 자체의 변화에 대한 암시이고, 따라서, 나의 일상과 나의 의식과 의식에 대한 의식의 기나긴 한 데 맞물림과 그 변화에 대한 암시이다. “어떤 두려움을 끝에서 끝까지 주파한다면, 그것이 바로 환희인 것이다”라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의미로, 어떤 싸움을 끝에서 끝까지 주파한다면, 바로 그것이 화해인 것이다. 모든 거짓 화해는 싸우지 않는 데서, 모든 추악한 싸움은 화해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중요한 것은 싸움도 화해도 아니라, 그 싸움과 화해가 하나로 맞물린 과정이며, 그것의 구체성이다. 이 추상화 같은 소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구체성이다.
1993. 8,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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