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반걸음의 오차 -이명행의 『노란 원숭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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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소설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추리소설인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이명행의 『노란 원숭이』(해냄, 1996)는 한국의 현재 위에 가상의 한국을 입힌다. 그리고 가상은 반-현실도 비-현실도 아니다. 피에르 레비가 적절히 말했듯이 가상적인 것(le virtuel)의 반대는 현실적인 것(le réel)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l'actuel)이다. 가상적인 것은 현실화되기 위해 준동하는 잠재태다. 작가가 입힌 또 하나의 한국은 실제의 한국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그 둘은 너무나 닮았다. 실제 한국의 도처에 난 물집들을 슬쩍 건드리기만 하면, 잠복된 한국이 진물처럼 흘러나온다. 가상의 한국은 실제 한국보다 반 박자 빨리 걷는 실제 한국이다.
반걸음의 오차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무시해도 좋은 오차인가? 그렇다. 그러나, 아니기도 한다. 작가는 소설 속의 한국을, 다시 말해 허구의 한국을 실제의 한국인 듯이 말한다. 배경을 이루고 있는 정치적 환경은 오늘의 정치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집권당의 인맥 구성이며 ‘구리하라 재단’이며 ‘북한 핵문제’며 모든 것이 우리가 흔한 일간지를 통해 접했던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첫 세트를 이루는 서초구 우면동의 빌라단지는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보면 확인할 수 있는 실제 동네이다. 그러니, 독자는 문득 실화를 듣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법도 하다.
그러나, 독자는 무엇보다도 소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허구임을 잘 알아차리고 있다. 표제가 끈덕지게 지시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장편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손에 든 독자의 기대의 지평선은 애초에 소설 쪽으로 향해 있다. 독자는 허구에 대한 약속을 통해 이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현실과 너무나 흡사한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한여름밤의 꿈인가? 악몽인가?
현실인 듯한 가상, 나는 그것을 ‘반걸음의 오차’로 정의했다. 그 오차의 뜻을 밝히는 일이 남는다. 실로, 속도는 이 작품의 핵심 기능소이다. 첫 문장을 보라. “새벽 4시 10분”이라는 오직 시간만을 가리키는 간단한 명사구로 이루어져 있다. 첫 문장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시퀀스는 모두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시작한다. 헌데, 4시나 4시 15분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4시 10분인가? 어쩌면 그것은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을 경험한 작가의 무의식을 분석해야 풀릴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시간의 세목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기능이다. 새벽 4시 10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한 정보 회사의 직원이 테러를 당하고 그로부터 6시간 후에 납치당했다. 그런데, 그 직원, 즉 “김용만은 시계추처럼 정확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타인이 자신을 습격할 여유를 결코 주지 않을 사람이었다. 헌데도 그가 당했다면, 그를 습격한 자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김용만이 시계추처럼 정확한 사람이라면, 그를 덮친 사내들은 실제의 시간을 기준으로 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러한 포착 불가능성이 시계추처럼 정확한 김용만을 오류의 함정으로 밀어넣는다. “그가 보기에 두 사내의 행동은 어설펐다. 어쩌면 그들은 김용만 자신을 잘 모르는 애숭이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안다면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이들의 어설픈 행동이 의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들의 이 세련되지 못한 껄렁한 태도는 무엇일까. 김용만이 이들의 그것이 의도된 것이었음을 안 것은 잠시 후였다.”
이 첫 시퀀스에서 충분히 암시되고 있듯이, 이 소설은 시간 싸움을 그 동력으로 하고 있다. 황인배의 납치를 눈앞에서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조관식 수사팀의 실패는 바로 시간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클라이맥스 또한 박승재-최소영과 지바-스티브 간의 치열한 시간 쪼개기 싸움으로 표현된다. 이 시간 싸움은, 헌데, 현존하는 여러 시간들의 싸움이 아니라, 현존하는 시간과 있을 수 없는 시간 사이의 싸움이다. 있을 수 없는 시간이라고? 왜냐하면, 인물들을 압박하고 당황케 하는 사건들은 항상 전자의 시간 의식을 넘어서버리기 때문이다. 김성수 국장은 오수석의 계산을 뛰어넘고, 지바 도이치는 김국장의 의지를 넘어서며, 구리하라 재단은 최소영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넘어선다. 인물들은 물건을 쥐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저마다 인형극의 끄나풀을 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두 개의 가상 현실이 있는 것이다. 하나는 모든 인물들이 기획하고 의지하는 미래이다. 다른 하나는 인물들을 당겼다 풀었다 하는 배후의 현실이다. 앞의 가상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화의 가능성으로 들끓는 잠재태지만, 뒤의 가상 현실은 미리 앞서서 현실화되어 있는 잠복태이다. 그리고 들끓는 것은 들끓기만 할 뿐이고 정말 준동하는 것은 ‘이미 현실화된 것’, 절대로 자신의 존재태를 물릴 의사가 없는, 아니, 들끓는 희망을 이용해 더욱 제 힘을 키우는 진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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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어떤 놀라운 전도가 있다. 실제의 현실이 가상적인 것이고 가상의 현실이 진짜 현실이다. 김성수의 의지, 박승재의 성실성, 성찬경의 근면함, 최소영의 순정, 머피의 저돌성은 한갓 꿈일 따름이고, 지바의 간지, 스티브의 비굴함, 루이스의 냉정함만이 현실 효과를 갖는다. 반걸음의 오차는 바로 이 전도를 가리킨다. 반박자 빠른 현실은 우리가 실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아주 위협적이다. 그것은 전자랜드에 가서 잠시 환몽적으로 체험하는 유희적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과 맞닥뜨린 존재들을, 최소한 감지하기만 한 독자들마저도, 무시무시한 불안 속으로 밀어넣는다.
왜 작가는 이렇게 쓴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간-텍스트적 참조가 유용해 보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부터 『남벌』에 이르기까지, 90년대 이후 부쩍 늘어난 가상적 민족 현실을 다룬 문화 생산물들 속에 이 작품이 위치한다는 것. 만화, 노래, 소설, 장르를 불문하고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는 그 문화 생산물들이 한결같이 보내는 전언이란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명령이자 신조이다. 민족 분단과 동족 상잔의 참혹한 현장 한 복판에서 태어난 50년대의 문학을 우리는 흔히 수난의 문학이라고 정의한다. 지금의 민족주의는 정확히 그 대척지에 서 있다. 마치 그동안 쌓인 응어리를 한꺼번에 쏟아붓듯이 가상적 침략을 무차별하게, 무분별하게 전개한다. 문화 산업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가 상품성이 있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다. 그동안의 모든 고통과 설움을 딛고 한국은 선진 자본주의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던 것이다. 그러니, 남은 것은 해원이고 과시이다. 해원과 자부심은 하나로 맞물려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 바꾸기 게임을 부추긴다. 모든 모방이 그렇듯, 한결같은 형식의 변주를 통해.
그러나, 독자들이 혹은 문화 향수자들이 이 작품들을 실제의 현실로 착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몰리는 것은 그것이 결국은 가상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혹은 한국인들은 작품 속의 사건이 실제 상황이라면, 그 결과가 어떠하든 얼마나 끔찍할 것인지 누구나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몰리는 것은 그러한 불안감과 불편함을 작품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 상품 속의 상황은 남의 일처럼 긴박하고 내 일처럼 가슴 벅차다. 그리고, 그 방관적 참여 뒤에는 근원적인 패배주의, 돌이킬 수 없는 열패감이 숨어 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제 대국에 대해, 결코 넘보지 못할 정치 군주국에 대해. 이 한판의 놀이들은 결코 동일화되지 않는 큰 타자에 대한 ‘노란 원숭이’의 자학적 흉내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명행이 그것들과 유사한 제재를 취해,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근원적 패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띤다. 작가는 우선, 작품의 상황을 가상으로 여기게끔 하는 어떤 표지도 지운다. 이 세트는 절대로 속임수가 없는 모델 하우스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당신은 바로 이 속에 있다”고 작가는 거듭해서 지적한다. 그러나 어쨌든 독자는 이 작품을 소설로 읽을 게 아닌가? 독자는 깨고 나면 잊혀질 악몽을 잠시 꿈꾸게 될 것인가? 작가는, 그러나, 깨어난 독자를 결코 놓아주지 않을 장치를 한다. 그는 민족의 문제와 민족주의를 섬세하게 구별한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실제이지, 이념이 아니다. 진정 그것이 어떠한가의 문제, 저 옛날 실증주의 역사가들의 모토였던 명제,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과거 한때에 살았다 죽어버린 화석들로 취급하는데 결정적인 출발선이 되었던 그 명제가 여기에서는 그것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활동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이 작품 안에서는 그것이 진정 어떠한가? 정책 결정자들과 정책 실무자들 사이의 대립이 그 장치의 기본 형식이다. 정책 결정자들은 무지하거나 탐욕적이거나 뒷거래가 있다. 그에 비해, 실무자들은 책임감이 강하고 한국의 현실에 바른 길을 내기 위한 의지와 열의로 충만해 있다.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런 대립 구도는 그러나 긴밀한 구성적 관여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문제는 사실이지 이념이 아니라는 근본 메시지에 상응하는 형식적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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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가 중요하다는 것이 마침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에 관한 한, 그것은 작품이 끝났어도 상황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한판의 놀이가 아니다. 이것은 끝날 수 없는,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상황이다. 여기에서 『노란 원숭이』는 문화 산업의 우리 안에서 놀아나는 모든 노란 원숭이들의 작품들과 정면으로 대결한다. 아마도 결말은 그 대결 끝에 작가가 발견한 희귀한 결론일 것이다. 마침내 자기의 진실에 직면한 최소영에 의해서 비극적 진행이 정지하고 일종의 해피 엔딩에 이른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음모에 대한 사랑의 승리로 읽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그런 척한다. 아마도 대중과의 타협점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 주제일 뿐이다. 내심은 다른 것이다. 최소영과의 전화가 끊겼을 때, 박승재는 “한동안 어두운 방안에 누워 있었다. 머리 속이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 그 이후에도 확실하게, 프로타고니스트들의 계산대로, 의기양양하게 해피 엔딩이 맺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연성에 의해서 주인공들의 의지를 비켜가면서 진행된다. 다만, 최소영의 그 전화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연과 모략과 폭력의 황사로 뒤덮인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사실과 직면하는 계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걸음의 오차를 일치시키는 순간, 그 순간은 항상 일회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회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 의해 되풀이 시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독자가 책장을 덮는 순간, 그의 무의식을 관통하면서 지나가는 끈끈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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