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명랑소설로 본격소설을 치다 -이석범의 『권두수 선생의 낙법』 본문
이석범의 『권두수 선생의 낙법』(민음사, 1993)은 얄개전 류의 청소년 명랑 소설에서 그 기본적인 구도를 빌어오고 있다. 불랑(불량)고등학교, 권두수(관두슈), 박문응(무능), 김갑출(깝출), 고수선(어수선), 주윤봉(주윤발) 선생 등 희화화된 명명이 그렇고, 그 모자란 인물들이 벌이는 엉뚱한 행동들과 그들이 겪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그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채 저마다 한 건 할 생각을 궁리해내는 그들의 열심을 노글노글하게 묘사하는 문체가 그렇다. 이석범의 소설은 저 옛날 전기스탠드를 이불 속에 숨겨놓고 밤새 킬킬거리며 소설 읽던 시절을 문득 돌이키게 한다.
그때 그 시절, 그 소설들이 여드름 송송 돋아난 선머슴들의 눈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그곳에 유년과 성년을 가르는 울타리를 허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선 상상의 우리들도 어른들도 모두 덤벙거리고 허둥대었는데, 그러나, 우리들의 엉뚱한 행동은 기성세대가 강요한 규칙과 금기를 깨뜨리는 ‘혁명적’ 행위로 격상하였고, 어른들은 허점투성이의 고집과 허망한 욕심으로 한없이 낮추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권두수 선생…』이 그 재미만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오늘의 시선을 자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명랑 소설이 어디까지나 ‘명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것이 현실 속에 무사히 편입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달래주는, 일종의 키재기 연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선생님 또는 경험 많은 노인이 언제나 아이들의 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권두수 선생…』이 명랑소설 이상이라는 것은, 우선, 기본 구도를 거기서 빌어왔으되 소재를 거꾸로 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주인공들은 사춘기 아이들이 아니라 교사들인데, 그러나 그들은 ‘선생님’의 미화된 형상처럼 지혜롭지도 순수하지도 못하며, 아이들처럼 여드름 빛깔의 미래를 갖고 있지도 못하다. 그들의 삶이란 순응과 체념, 굴종과 잔수로 찌들어버린 못나고 허술한 인생에 불과하다. 작가는 그 닳아빠진 인생을 그냥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 구성된 한 판의 이야기로 짜내는 데 성공한다. 황윤세 선생의 이야기가 작품의 앞뒤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은 작가가 소설의 구성을 아주 의식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은 황윤세가 시간강사로 발령받는 때에서 시작하여 정식 교사로 임명되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데, 그 과정은 밀고의 대가로 얻어진 그의 정식교사로서의 새 삶이란 것이 결국 추저분하고 낡아빠진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무섭게 확인하고 마는 과정이다. 「에필로그」의 한 구절을 빌자면, 정식교사의 첫 순간은 “시작이었으되 이미 종말이었고, ‘충만’으로 위장된 ‘소진’의 증후”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집이 명랑 소설의 그것과 달리 개인적 성장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을 현재진행의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물들의 엉뚱한 행동들은 그 미래를 제거당한 채 너절해지고, 그것으로 그의 모델이 제공했던 것과 같은 현실에 대한 낙관적 긍정은 형편없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권두수 선생…』이 명랑소설을 배반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후자에게서 구도를 빌어옴으로써 또한 오늘날의 진지하고 엄숙한 한국의 고급 소설들을 뒤집는다. 작품이 명랑소설적 구도를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보여주는 것은 존재의 대책 없는 허술함이다. 그 허술함 속에서 분노하는 얼굴은 아부하는 표정과 깍지끼워져 있으며, 사회적 대의는 개인적 욕망에 실려 질주하고 주저앉는다. 심지어 작가는 교묘하게 자신까지도 그 허술한 존재들과 한 통속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바로 ‘희삼이’를 통해서이다. 그는 희삼이를 자신이 가담했던 한 사건의 객관적 화자로 만듦으로써, 관찰자인 작가 자신도 너저분하고 허술한 세계의 한 사람임을 은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후기를 보면 그 자신 해직교사인 작가가 이 ‘교육 현장 소설’을 쓰면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는데 얼마만한 인내가 필요했으랴. 그러나, 또한 그 분노를 억제하면서 얌체 황윤세와 껑충하고 깡마른 양자영 선생의 두 모습을 그의 글에 안타까운 긴장으로 새겨넣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했으랴. 소설은 개인의 영웅됨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됨을 성찰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견뎌낼 수밖에 없는 그 고통을. 그가 소설쟁이인 한은.
1993. 3. 10, 한국일보, 사회모순 다룬 명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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