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얼음 속의 실핏줄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하나

얼음 속의 실핏줄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

비평쟁이 괴리 2022. 11. 20. 15:43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문학과 사회1993 )는 아주 흥미로운 소설이다. 주인공 임휘경은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묘한 화두에 발이 묶인 사람인데, 발 묶인 곳은 진평이라는 겨울 휴양지이다. 그는 육체의 감금을 대가로 한 편의 소설을 쓰려고 한다. 물론 소설의 주제는 육체의 감금이다.

-그로 지칭되는 소설가 임휘경은 그가 세 개의 신분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는 작가 최수철의 분신일 수도 있으며, 이야기의 화자이기도 하고, 사건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작가의 분신으로 읽을 때, 얼음의 도가니는 그의 이전 소설의 극복과 관련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세밀 묘사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으며, 제재가 다양해지고 제재들 간의 기능적 연관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를 통해서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그의 이전 소설의 심리적 뿌리이다. 나는 최수철의 미세한 것에 대한 집착이 노출에 대한 공포와 욕망이 뒤엉킨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번 소설을 통해 그 배경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주인공 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그의 사건은 과거와 현재의 대립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그의 과거는 감시/저항과 보호/반항의 대립적 상황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감시/저항을 대표하는 것은 당국의 감시와 그의 프랑스에서의 발언이며, 보호/저항을 대표하는 것은 그를 보살피려하는 스승의 눈길과 그것을 회피하는 나의 의식이다. 문제는, 그러나, 감시/저항 혹은 감시/보호의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둘이, 아니 넷이 실은 하나라는 것에 있다. 보호와 감시는 모두 사회라는 큰 틀에 개인을 가둔다. 한 사람의 작가 임휘경을 제도 속에 정연하게 배열된 수많은 책상들중의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항과 반항이 큰 틀 밖으로 삐쭉 나온 작은 책상 하나를 보장해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사회와 개인의 대립은 결국 같은 비중을 가진 것들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이어서, 개인은 사회의 크기에 맞먹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어느새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입 속에서 밖으로 뻗쳐나온 그 손이 거꾸로 그의 목을 죄고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제도의 탐조등에 노출되는 데에 대한 공포는 곧 제도의 크기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과 하나였던 것이다.

반면, 그의 현재는 제도의 큰 틀이 먼지처럼 무너진 상태에 있다. 제도가 없으니 모든 존재는 각자일 뿐이다. 그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이 현재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하나의 개별자임을 확인받는다. 하지만 거기에도 허방이 있으니, 실제 그가 확인하는 것은 그 개별자는 복제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타자의 의식에 의해서 확인된 존재, 즉 타자의 의식의 복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타자의 의식에 의해 무한 복제된다. 때문에 나의 자유로운 욕망의 끝은 언제나 엉겨붙은 타자의 존재에 살점이 묻어나 일상의 신에게 제공된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았다는 의식의 후회이다. 그는 다시 한번 큰 틀 속에 갇힌다. 과거의 철로가 욕망과 회환 사이의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와 그를 단숨에 단단한 얼음 속에 가두어버린다.

사르트르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인식은 그가 제도와 복제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개인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이번 소설의 진미는 그 너머에 있다. 어딘가 하면, 바로 화자의 입술이다. 그 입술이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화두에 대답하는데, 대답은 세 번의 변주를 거친다. 그 하나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나를 책임지지 못했고 현재의 나는 고기조각들에 불과하다. 그러니, 나는 불붙는 도가니가 못되고 기껏 얼음의 도가니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나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얼음 속으로, 자진하여 들어가는 것. 그래서 도가니가 되고자 몸부림치다 얼음으로 굳어져버린 자의 모습을 증거로 남기는 것. 그것은 진평에서 그가 쓴 소설의 마감과 함께 한다. 그런데, 마지막 대답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답은 그가 자진하여 유폐되려 한 세상이 그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얻어진 것인데, 그 거부가 준 육체의 상처 덕분에, 그가 얼음의 도가니이듯이 세상 또한 도가니의 얼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탓이다. 세상은 나이고 나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이고 그는 나이다. 아니, -그는 나()이다. 그러니, 소설은 다시 씌어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육체의 감금을 대가로 육체의 감금을 주제로 한 소설을. , 내가 그에 대해 쓰는 소설이 아니라, ()가 씌어지는(쓰는) 소설을. 얼음의 도가니는 끝없이 되풀이된다. 그곳에 삶의 실핏줄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 1993. 3. 31, 한국일보, 끊임없는 상념의 되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