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그 모든 실수들이 언젠가는 다 드러날 것이다 본문
고종석씨가 인터넷에 내 오역을 지적하는 발언을 올린 걸 읽었다. 놀라서 살펴 보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잘못이다. 위고Hugo의 시, 「잠든 보아즈」중의 “haineuse”(증오에 차 있다)를 “가증스럽다”라고 옮긴 것이다. 1999년에 『한국기호학회』지 제 5집에 발표했고 2005년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이라는 평론집에 수록했던 글, 「정신분석에서의 은유와 환유」에서이다. 책에 실을 때 아무런 검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잘못이 하나 더 보태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앞만 보고 달리는데 급급하여 되돌아볼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늘 그랬다. 그러니 내가 알지 못한 채로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10여 년이 훨씬 지난 이제 와서 그 실수가 발각되는 걸 보니 앞으로도 ‘발굴’될 것들이 백사장의 모래알 숫자만큼 될 것이다. “진실은 드러나고야 만다”는 옛 금언이 생각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가만히 생각하니 또 다른 오류가 그 안에 숨어 있다. 위고의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라깡이 인용한 이 대목을 단순한 전거로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역을 자각하지 못한 더 큰 원인이다. 나는 어떤 문학 작품을 그 존재로서 대하지 않고 도구로서 써먹은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항상 타기해 마지않는 짓이 아닌가? 그걸 나 스스로가 범한 것이다. 내 삶의 어느 순간에 나는 아주 불성실했던 것이다. 그 어느 순간들을 합치면 장강처럼 길 수도 있으리라. 이제나마 오류를 깨달았으니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나를 더 단련하는 수밖에 없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게 사람이다. 김현 선생님이 아벨 레이에게서 따 온 “인간은 오류를 통해서 성장한다”는 말은 늘 나의 금과옥조이었다. 그리고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방식이 어떠했든, 나의 선생이다.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