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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혁명은 라이브다

비평쟁이 괴리 2014. 2. 28. 11:10

 

 

혁명은 재방영되지 않을 거야. 형제들. 혁명은 라이브일 거야.” 소울 뮤지시언, 질 스콧-헤론Gil Scott-Heron이 그의 노래 혁명은 TV로 방송되지 않을 것이다(1970)에서 한 말이라고 르 몽드의 장 비른바움Jean Birnbaum이 전하고 있다. 대통령을 도망가게 한 우크라이나 혁명의 경과를 TV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가수의 말은 조금도 무색해지는 데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TV를 통해 혁명의 풍경을, 기껏해야, 몇 개의 장면들을 보고있을 뿐, 혁명하고있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은 오직 세상의 개벽과 나의 거듭 남의 완벽한 맞물림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고유한 의미에서의 혁명이란 오늘날 오로지 장기생성적인 양태로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는 말을 덧붙여야한다고 생각한다. 급진 혁명의 옛날의 사례들은 현대인들에게 놀랍게도 그 벼락에 적응해 그것을 제 식으로(결국 이 말은 저를 이롭게 하는 방식으로라는 말의 줄임말에 불과한 것이다) 활용하는 능력을 개발하는 계기들로 작용했으며, 그 재편의 기술이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태들이 사방에서 출몰하는 이제는, 그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은 혁명을 길게 치르어 낼 인구의 수가 증가하는 것이, 다시 말해 나날의 삶을 혁명에 단속(斷續)시키는 게 지배적인 일상이 되도록 환경을 개선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혁명의 필수 요건이 될 것이다. 가수가 그것마저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혁명이 라이브라는 말의 뜻을 여기까지 연장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자는 문학 교수를 꿈꾸었던 가수가 마약중독의 상태에서 부랑자로 죽었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하필이면 그 왼쪽에 장-뤽 모로Jean-Luc Moreau가 쓴 피에르 애르바르의 전기’, 피에르 에르바르, 헐벗은 이의 오연함Pierre Herbart. L’orgueil du dépouillement(Grasset)을 소개하고 있는 장-루이 자넬의 기사도, 헤르바르가 극도의 궁핍 속에서 죽었다는 얘기를 끼워넣고 있다. 그의 시대에 있었던 모든 해방전선에 참여했으며, 렌느Rennes의 탈환을 이끌었던 이차세계대전의 영웅이자, 기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놀라운 정확성을 가지고 무자비할 정도로 명징하면서도 결코 냉소적이지 않았던 건조한 문체의 저널리스트였던 이 사람이 말로Malraux, 사르트르, 카뮈가 누렸던 개선자(凱旋者)의 영화를 한 점도 나누어 갖지 않고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 망각 속에 파묻혀 있었던 것은 무슨 연고인가? 자신이 이룬 공훈에 대한 어떤 대가도 거부하고 그의 인생 자체를 그렇게 헐벗음의 진리 속으로 몰아 넣은 그의 태도가 필연적으로 수락해야할 운명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다른 원인들이 있는가? 진화의 수행은 개체가 치러내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개체적 수준에서 현상되지 않는다, 는 내 나름으로 깨달은 진화의 원리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수행자의 이토록 잔혹한 삶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책을 주문하는 내 손이 편치가 않다.(2014.02.28.)

 

유튜브에 들어가보니, 질 스콧-헤론의 노래가 많이 올라 와 있다. 문제의 노래는 다음 링크에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rGaRtqrlGy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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