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희망 고문을 관두자, 절망에서 현타가 오다.- 김유진의 『평균율 연습』 본문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6회 세 번째 독회의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김유진의 소설,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10)을 읽으면서 AI에게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물어보았다. AI는 꽤 다양한(?) 대답을 주었다.
(1) 2024년 4월 기준으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43개국 중 52위로 나타났습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평균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약 5.94점으로 150여 개국 중 57위에 위치했습니다.
(2) 2024년 5월 기준으로 한국의 지구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38점으로 전체 147개국 중 76위로 나타났습니다.
(3) 2024년 5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아동·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총점 100점 만점에 45.3점으로 나타났습니다.
(4) 1인당 국내총생산 순위(25위), 기대 수명(3위)에서 매우 높은 순위를 기록했음에도 총 행복지수는 낮은 편입니다.
발표 내용이 중구난방이고 항목들도 일관되지 않지만, 네 개의 정보가 수렴하는 건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꽤 낮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그리고 이는 통상 언론에서 전달하는 정보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갑자기 ‘행복지수’가 궁금해진 까닭은, 김유진의 새 소설, 『평균율 연습』의 주인물, ‘수민’과 ‘수찬’의 정서가 일종의 만성적 좌절의 상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살지만, 그런 소망은 “반복되는 좌절”만을 안겨주었고, 이릍 통해 “삶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기대를 저버리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p.55)은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다. 더욱 처연한 것은 그가 기대하는 것들이 무분별하게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생각한다.
수민은 살면서 늘 무분별한 기대를 경계하려 애썼다. 어린 시절 자석이 달린 캐릭터 필통이 생일 아침 머리맡에 놓여 있길 바라는 마음, 늦은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누구라도 어두운 골목 어귀에 마중나와 있었으면 하는 바람, 언젠가는 사회에 꼭 필요한 구성원이 되리라는 소망, 자신이 하는 일이 밥벌이 외에도 의미와 가치를 지닐것이라는 희망, 애정이 공평하게 되돌아오리라는 기대, 기다리면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막연한 낙관 같은 것들.
그러니까 ‘내 안의 아주 작은 소망들’마저도 늘 무너지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삶은 완벽하게 일상화되어서 조금이라도 좋은 기미가 있으면 “이렇게 잘 살아 있어도 되나, 걱정”(p.168)이 될 지경이다.
이런 사정을 선명하게 상징하는 게 첫 부분의 ‘방파제’이다. 바다를 보러 갔더니 그 앞에 키보다 높은 방파제가 가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방파제는 이중으로 기능한다. 한편으론 인물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걸 가로막는 장벽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방파제가 차단막이 됨으로써 방파제 안쪽 역시 바다로 흘러가지 못해서 지상을 침수시키는 물의 늪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너머의 바다는 모험의 장소이지만, 안 쪽은 인물을 끊임없이 침전시키는 슬픔의 수족관이다.
그해 바다를 생각하면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슬픔은 어디서 이렇게 끝없이 밀려오나.(p.171)
그러나 기대가 자잘한만큼 슬픔을 유발하는 좌절들도 인물들에게는 콩알탄들이 따가운 감각과 함께 자욱이 낸 자국들을 남긴다. 이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정조는 상처들의 소용량성 이동이 낸 마음 바닥의 표면 형상들이다. 그것들은 상처이면서 동시에 인물 자신이 어루만지고 싶은 귀한 대상들, 추억들이고 꿈들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표면 현상들의 이중적 해석 가능성을 통해서 인물들이 때마다 생로운 생의 의욕을 지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민은 “예술의 과정에 존재하는 사소한 실책의 순간들”(p.201)을 좋아하는데. 이는 그가 그 순간을, 생이 자아낸 슬픔을 예술에 투영하면서 예술을 생의 표현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예술의 현실 일탈성에 의해서 예술 교정을 현실 교정의 계기로 만들 줄 알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속적인 좌절은 연속적인 교정 행위와 겹쳐지고, 그 과정 자체가 “고치고 또 고쳐 쓰는 것이 소중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오래되고도 낯선 세계”를 형성하며, 인물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p.202)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끈다.
한데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에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상투적인 ‘희망 고문’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발생하는 반전은 희망의 불가능성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실마리를 얻는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그것이다. 즉 인물들이 소량의 에너지로 때마다 피우는 의욕은 현실의 구체적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사소한 세목들을 수정해보는 절차를 발생시키는데, 이는 ‘순정율’에서의 탈락이 불협화음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음’의 학습을 거쳐 ‘평균율’의 개발(연습)로 나아가는 음악사의 진화 과정에 투영된다. 요컨대 여기에서 ‘평균율’은 미리 전제된 행복자원(협화음)에 근거하지 않고 주어진 삶을 공평하게 쪼개어 새로운 생의 자원으로 쓰겠다는 태도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희망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희망으로부터의 단절’이 그를 살게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인에게 미만한 ‘한(恨’)의 감정과 2000년대부터 두드러진 현상으로 등장한 ‘다이나믹 코리아’ 사이의 어긋남을 이해하기 위해 꽤 오래도록 고민하다가 한의 격화가 역동성으로 전환되는 알고리즘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을 ‘원한과 설움으로의 침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이를 ‘다스림’과 ‘삭힘’이라는 옛날식 해법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무언가에 기대는 마음의 폭락’으로부터의 반동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절망의 요지부동으로부터 ‘현타’가 오는 것이다. 이는 그 자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Viktor E. Frankl이 수용자에 갇힌 사람들로부터 발견한 ‘각성치유logotherapy(현실에 대한 논리적 운산을 통한 치유: 요즘 유행하는 어휘로, 이 말이 국어사전에 등재될 수 있다면, 현타치유라고 명명하는 게 가장 적절할 것이다.)’의 방식과 유사하다.
그 점에 비추어본다면 김유진식 좌절감은 한의 감정의 축소판이다. 이 축소는 그런데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한→‘다이나믹’의 변환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효과를 가져오지만, 김유진식 생존법은 좌절과의 일상적 게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이 축소판과 확장판 사이의 동형성homologie과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소설가의 작은 의욕들에도, 한국인의 요란한 역동성에도 그 반동의 양상은 보이지만, 탄성판의 구조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이 문제에 유독 집중하는 까닭은 그것들에 대한 철저한 해명이 한국인과 소설가의 장래를 얼마간 가늠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모두에서 살펴본 한국인의 아주 낮은 행복지수가 가리키는 방향을 측량하는 일과도 깊이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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