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새로운 재능이 나타났다!”- 현호정의 『한방울의 내가』 본문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6회 세 번째 독회의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아무리 좋아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독서도 오래 하다 보면,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작업의 관성이 주는 피로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럴 때 일어나는 조바심 현상 중 하나가 어떤 말을 한 번쯤 터뜨리고 싶다는 은근한 충동이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해서 묵직한 체증으로 가라앉다가, 긁을 데를 알 수 없는 가려움증으로 바뀌어서 몸 안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그 ‘어떤 말’은 이를테면 “뛰어난 재능이 나타났다!”는 놀람 겸 환호 겸 외침 같은 것이다. 훗날 그 말의 발성자가 ‘페이디피데스’가 될지, 양치기 소년으로 판명이 날지는 나중의 문제로 차치하고서 말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때론 짐작조차 못했던 어떤 새로움이 실물을 만지는 감각을 안기며 눈 앞에 돌출하는 사건에 정신의 두개골 바깥으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건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서의 세뇌(洗腦)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미 한국 고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환상 소설들을 써왔으며, 지난해에는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단명소녀 투쟁기』, 사계절, 2024)라는 도발적인 언어로 새로운 작가의 출현을 선포했던 현호정은 『한방울의 내가』(사계절, 2025.01)에서, 통상적인 상상력의 울타리를 멀찍이 월장(越墻)한 넓은 생각의 시공에서 다종의 존재들을 춤추게 한다. 첫 소설 「라즈베리 부루」에서부터 어휘 ‘라즈베리’가 내포한 상상적 자원을 저인망에 담아 끌고 다니며 산딸기의 고독과 유혹, 생리혈의 다중적 연상을 거기에 투영시키면서 생명 진화의 한 계기를 환상적인 풍경으로 펼쳐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단어들과 인물들과 사물들과 생물들이 제각기 상상적 복합체로 구성되면서 화응과 비각과 병행 등등의 다양한 양태로 상호 공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날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가 규정했던 대로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소설의 속성을 한껏 활용하여, 이야기와 극과 시들 사이에, 또한 일상 묘사와 옛이야기와 환상 동화들 사이에, 그리고 여러개의 언어langues들 사이에도 특이한 메아리가 울리고 뻗치고 새고 빠져 나가는 바람을 일으킨다.
그 밑바닥에는 현실이라는 불가해한 거인 앞에 다윗처럼 언어의 돌멩이를 든 왜소한 자아가 있다. 몸은 작지만 그 작은 크기 덕분에 다른 생명들을 수레로 삼아 질주하기도 하고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기도 한다. 그런 일을 하는 동력은 현실을 뛰어넘어보겠다는 뜨거운 의지와 더불어 그가 만나는 모든 존재와 사건과 말들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이, 요리해서 먹어치우는 각종 레시피의 개발이고, 또한 기타 등등일 것이다.
판단컨대 시방 그의 소설은 빅뱅 이후 인플레이션의 상태에서 들끓고 있다. 차후 어떤 소설의 우주가 형성될지는 소설가의 자의식이 여하히 활동하며 우주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운동을 거듭할 것인가에 달려 있으려니, 그 향배를 지켜보는 마음이 무심하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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