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지나치게 밝은 슬픔-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 본문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6회 두 번째 독회의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문학동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건 만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배경이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배경이 사건에 통합’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의 행위 차원은 맥락과 사건으로 구성된다. 사건은 형상의 출현과 전개를 맥락은 그런 형상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알려준다. 맥락을 통해서 독자는 사건을 이해하고 그 사건의 추이에 대한 다양한 판단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맥락의 파악은 소설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사전 인지’ 사항이 된다.
김지연의 소설에는 그런 맥락이 없는 것이다. 한데 사건만이 있다고 해서 스릴 넘치는 사건들이 하냥 펼쳐지는 건 아니다. 황석영식 행동주의 묘사는 여기에 없다. 왜냐하면 이곳의 인물들은 맥락을 반추할 여유가 없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여유가 없다는 것은 그들이 홍수나 해일과 같은 현실의 맥락 속에 위태롭게 휩쓸려다니는 돛단배와 다름없는 신세라는 걸 가리킨다.
어쩌라고. 할 수 있는 걸 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물속에 있었다. 모두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p.253)
같은 진술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맥락에 개의치 않는 게 아니라, 거꾸로 맥락에 삼켜졌기 때문에 맥락의 잔여물로서 겨우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현은 자신에게 그런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p.84)
와 같은 진술은 그런 사정을 명료하게 요약한다.
한데 소설적 묘사의 흥미는 이 지점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맥락에 삼켜진 인물의 심리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그대로 복제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예를 보자.
정현은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치를 서일에게 주고 싶었다. 그 당시에는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채마저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너 지금 속으로 걔 편들었지?” (p.82)
이 인용문의 앞 문단(지문)에선 곤경에 처한 인물이 자신의 심리를 노출하고, 뒤의 발언에서는 대화 상대자가 인물의 심리를 꼬집는다. 이 둘 사이에는 간극이 없다. ‘지문’과 ‘대화’가 즉각적으로 이어짐으로써 둘이 하나로 통합되고 내용의 질적 차이에 의해 앞 문단의 지문은 뒷 문단의 대화에 종속되게 된다. 그럼으로써 지문은 심리 묘사가 아니라 그대로 심리의 표백이 된다.
묘사의 객관적 거리가 사라지고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요동이 된다는 것이다. 모두에서 “배경이 없고 사건만이 있다”라고 판단한 소이이다. 이럼으로써 김지연 소설의 추이는 심리적 지하 생활자의 긴박한 마음의 표현이 되고, 독자는 생각에 앞서서 감각적 음미에 초대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인물들의 긴박한 마음의 표백은 행동 불능의 상태의 표출이다. 그 마음이 꿈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꿈꾸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일들. 일어날 수 없는 일들”(p. 247)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은 계속 ‘공허’만을 가습기 김처럼 내뿜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없는 기운이 현실의 욕망으로 가득찬 대기를 희석시키고 맑은 풍경을 조성한다. 그 풍경 속에서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 어두운 골목에서 슬픔은 너무 밝아 늘 들키고 만다.(pp.260~61)
에 표현된 대로 너무 밝은 슬픔이다. 그 슬픔의 광원이 현실의 더러움과 슬픈 인물들을 동시에 비춘다. 물론 맥락이 제거된 이 소설들에는 그 현실과 인물들 사이에 결정적인 연결은 없다. 인물들의 서글픈 형상은 원인도 결과도 없이, 오로지 현재 상태만 부조된다. 덕분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현실의 시간에서 배제된 이 존재가 자주 찾는 건 무의미한 유희 혹은 쓸데 없는 몸 동작들, 자연적 사실에 대한 관찰들 뿐이다. 이것이 현실과의 투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의 탐구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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