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거짓말의 향연 속에 감추어진 어둠의 가능성- 김홍의 『여기서 울지 마세요』 본문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6회 첫 번째 독회의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상층부 경영인들의 오류로 ‘프로야구’가 망했고 심지어 금지까지 된다는 이야기가 가능한가? 이런 이야기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란 건 프로 야구팀 어린이 회원이 아니더라도 금세 알 수 있다. 이야기 성립 불가능의 증거를 대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야말로 한심한 짓이리라. 이 스포츠가 옆 나라에도 태평양 건너에도 매일 시끌벅적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만 상기하면 된다.
이 소설집(김홍, 『여기서 울지 마세요』, 문학동네)의 거의 모든 세목들은 멀쩡하고 뻔뻔한 허구들로 빼곡하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다.
벨이 보이지 않아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집에서 나온 사람은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코스타 씨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코스타 씨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거구의 사내였다. 우락부락한 팔뚝으로 나를 끌어안더니 양볼에 가볍게 키스를 건넸다.(p.47)
포르투갈에 일을 구하러 갔다가 안내인이 소개한 사람을 찾아간 사건의 묘사이다. ‘코스타 씨’에 대한 묘사, 즉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거구의 사내”, “우락부락한 팔뚝” 등은 ‘포르투갈’이라는 단어의 음성적 이미지가 만들어 낸 인물상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아무리 유럽인이라고 하더라도 처음 본 사람에게 무조건 볼을 부비는 ‘비주’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순전히 작가가 머리 속의 공상을 통해서 창안한 것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김홍식(式) 거짓말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장기간에 걸쳐서 한국인들 안에 누적적으로 형성되었으며 현재의 시점에서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상투적인 인식의 내용 및 패턴에 근거한다. 이 인식들은 반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에 기초하고 반은 그런 사실들에 대한 중구난방격의 생각들로 쌓이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수렴된 집단적 상상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둘째, 작가는 이런 가상 인식들을 과장적으로 왜곡함으로써 그런 인식들에 모종의 즐거움을 더한다. 이 즐거움은 상투적인 인식을 일그러뜨려서 그 허위성을 드러내어 풍자하고자 하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애초의 허위에 더 허위를 보태어 상상의 영역을 넓히면서 확장(확장은 정복이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걸 목표로 하는, 대체로 ‘만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유희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소설의 바탕이고 진짜 소설은 그 허풍선 안에 말려서 은밀히 진행된다. ‘인생은 즐겁다La vie est belle!’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듯한 이 이야기들의 뒷무대에서 주요 인물들(주로 화자)이 지독한 무기력과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너머의 이야기다.
중심 인물의 공허감의 원인은 바로 파악이 된다. 무엇보다도 저 인식의 유희들이 사실성으로 포장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삶의 뜻에 무게를 얹지 못하는 자질구레한 ‘아전인수 진실들post-truths’을 소모적으로 즐기는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의 한국적 상황을 감안하면, 이런 ‘아전인수 진실들’은 ‘사회적 네트워크’를 거쳐서 정치의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가, 힘센 ‘대안적 사실들Alternative Facts’로 발전하는 게 상례인데, 김홍의 소설들에서 그것들은 바깥으로 폭발하지 않고 안으로 웅크리고 머무른다. 그럼으로써 그의 소설들은 정치권의 독재자들과 맹동자들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민초들의 우울한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이 가짜 진실들은 거짓말의 향연 내부에 모호한 어둠을 드리우고 그 안에서 상상된 진실들이 맥락을 구성하지 못하고 조리없이 이리 뒤뚱 저리 퐁당하면서 흐트러진다. 마치 뇌 좌반구의 ‘베르니케 영역’이 고장난 경우처럼 인접성 장애의 양상들이 전개되는 것이다.
일찍이 체코의 위대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유사성 장애’와 ‘인접성 장애’의 두 언어장애 양상으로부터 ‘은유’와 ‘환유’라는 핵심적 문학적 기법을 밝혀낸 것과 유사하게 김홍의 소설들은 이러한 ‘상상된 진실들의 맥락 붕괴’라는 현상의 묘사를 통해 어떤 문학적 의미단위를 구성하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보통 사람들의 진면목을 비추어보는 반성적 거울로 기능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전에 말한 정치권의 ‘대안적 사실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작은 반딧불들의 반짝임인가? 요새 유행하는 그 어떤 가요처럼?
아마도 이 두 방향의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이 이 소설들의 목표의 근저일 수도 있다. 즉 이런 넓은 해석의 가능성은 난무하는 상상적 진실들을 그 현상에서부터 뿌리까지 깊이 있게 성찰하게끔 유도하는 장치로서 이 소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김홍 소설은 현재의 상태에서 단지 무기력한 양상만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내부에는 심오한 진실 속으로 천착하기 위한 담금질이 진행되고 있다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에 미루어 보면 다음 대목은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손은 계속 쓰고 있고, 문득 시계를 보니 자정을 지나고 있다. 나는 손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왜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보고만 있었는지. 하지만 손은 그것에 대해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것은 쓰지 않을 거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잃어버린 것들을 한 번에 되찾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외로워졌다. 내게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갔을 때만큼이나 허전했다(pp.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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