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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한국인의 일본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문헌

비평쟁이 괴리 2022. 6. 16. 09:19

최근에 무슨 표절 사태가 있었나 보다. 새벽부터 우리 과의 유 시어도어 준 교수가 '카카오톡'으로 나를 불러내어 표절 현상에 대해 물어봤다. 유교수와 이런저런 사담을 나누다가(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그래서 썩 많은 웃음을 함유한 대화였으나, 지극히 사적인 내용들이 있어서 공개할 수는 없다), 김수영의 「시작노트 6」을 읽어 보기를 권하였다. 아래는 김수영의 글의 일부이다.

나는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 내 시가 번역 냄새가 나는 스타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비밀은 그런 천박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웃을 것이다. 괜찮아. 나는 어떤 비밀이라도 모두 털어내 보겠다. 그대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약점이다.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밖에는 없다. 그리고 내가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다. 이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다. 그대의 박해를 감수하는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근시안이므로 나의 참뜻이 침묵임을 모른다. 그대는 기껏 내가 일본어로 쓰는 것을 비방할 것이다. 친일파라고, 저널리즘의 적이라고. 얼마 전에 고야마 이도코가 왔을 때도 한국의 잡지는 기피했다. 여당의 잡지는 야당과 학생 데모의 기억이 두려워서, 야당은 야당의 대의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동아일보》라면 전통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사상계》도 사장의 명분을 위해서. 이리하여 배일(排日)은 완벽이다. 군소리는 집어치우자. 내가 일본어를 쓰는 것은 그러한 교훈적 명분도 있기는 하다. 그대의 비방을 초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때, 그대의 기선을 제(制)하지 않았는가. 이제 그대는 일본어는 못 쓸 것이다. 내 다음에 사용하는 셈이 되니까. 그러나 그대에게 다소의 기회를 남겨 주기 위해 일부러 나는 서투른 일본어를 쓰는 정도로 그쳐 두자. 하여튼 나는 해방 후 20년 만에 비로소 번역의 수고를 던 문장을 쓸 수 있었다. 독자여, 나의 휴식을 용서하라.

그러나 생각이 난다. T. S. 엘리엇이 시인은 2개 국어로 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을. 나는 지금 이 노트를 쓰는 한편, 이상(李箱)의 일본어로 된 시 「애야(哀夜)」를 번역하고 있다. 그는 2개 국어로 시를 썼다. 엘리엇처럼 조금 쓴 것이 아니라 많이 썼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이 일본적 서정을 일본어로 쓰고 조선적 서정을 조선어로 썼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반대로 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더욱 철저한 역설을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내가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망령(妄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것에는 동정이 간다一그것도 있다. 순수의 흉내一그것도 있다. 한국어가 잠시 싫증이 났다. 一그것도 있다. 일본어로 쓰는 편이 편리하다.一그것도 있다. 쓰면서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현상의 즐거움, 이를테면 옛날 일영사전을 뒤져야 한다.--그것도 있다. 그러한 변모의 발견을 통해서 시의 레알리테의 변모를 자성하고 확인한다.(자코메티적 발견) 一그것도 있다. 그러나 가장 새로운 집념은 상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약간 빗나간 인용처럼 생각키울지 모르지만 보부아르 가운데에 이러한 일절(一節)이 있다.

“프티 블의 패들은 모두 독창적으로 되려는 버릇이 있다.”라고 볼이 말했다. “그것이 역시 서로 닮는 방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 그는 치근치근히 또한 기쁜 듯이 자기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노동자는 독창성 같은 건 문제 삼지도 않고 있어. 나는 내가 그치들과 닮아 있다고 느끼는 것이 오히려 기쁘단 말이야.”

발뺌을 해 두지만 나는 정치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상이하고자 하는 작업과 심로(心勞)에 싫증이 났을 때 동일하게 되고자 하는 정신(精身)의 용기가 솟아난다.

-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2. 산문, 서울: 민음사, 2018, pp.553-554. (※ 참고로, 이 글의  서두에는 그의 시  「이 한국문학사」 전문이 인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기해 둔다.)

김수영의 이 발언을 이해할 수 있다면,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중의 하나의 비밀을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참고문헌이 있는데, 그건, 강계숙 교수가 쓴, 「김수영은 왜 시작 노트를 일본어로 썼을까?」를 비롯, 조연정, 한수영, 홍성희 교수들의 논문들이다. 이 논문들은 필자가 편한 , 연구집단 '문심정연' 김수영 연구의 새로운 진화 - 이중언어, 자코메티 그리고 정치, 보고사, 2015.에 수록되어 있다.

물론 김수영의 저 글은, 위 논문들의 해석 이상의 어떤 것들을 더 포함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우리 자신의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