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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디지털 시대의 사생활

비평쟁이 괴리 2022. 10. 19. 13:34

※  아래 글은 2015년 9월 16일 연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에서 열린, ‘디지털 시대의 사생활’을 주제로 한, 독일과 프랑스의 두 학자의 발표문에 대한 토론문으로 작성된 것으로, 필자의 평론집, 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문학을 위한 안내서(문학과지성사, 2016)에 실려 있다. 최근 카카오 데이타 센터 화재와 관련하여 참조가 될까 해서 올린다.

 

사생활의 보호를 넘어 디지털 문명의 자주관리로

 

울리케 아케르만 Ulrike  Ackerman, 안토니아 카질리Antonio Casilli, 두 분의 발표 잘 읽었습니다. 두 분의 글 모두 디지털 시대에 사생활이 크게 위협당하고 있다는 상황을 확인하고 이 위협이 곧 인류의 소중한 가치인 자유에 대한 침해임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정의 명료한 사례로서 두 글은 공통적으로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등 인터넷 독점기구의 핵심 멈버들에 의한 사생활을 부정하는 일련의 발언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디지털 문명 및 문화의 사용자 그 자신들에 의해서 조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두 분 선생님이 공히 인정하고 있는 이 사실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왜냐하면 보호되어야 할 사생활의 당사자가 스스로 그 보호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케르만 선생님은 그 문제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민들은 이것을 자유에의 위협으로 감지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개인정보를 취급하는 그들의 태도는 심각한 모순에 휩싸여 있다. 한편으로 정보 보호에 대한 욕망이 더욱 절박해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사용자 인구가 온라인에서 그 자신의 정보를 아주 무모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발표문은 이러한 난점을 십분 인정하면서도 사생활 보호의 당위성을 사생활의 성격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두 발표문은 다른 방향으로 분기합니다. 아케르만 선생님은 사생활에 대한 근대적 정의, 즉 “외딴 상태로 있을 권리right to be let alone”의 소중함을 중요한 가치로 제시합니다. 이 가치를 보듬기 위해, “우리의 개인적 자유와 자유로운 인터넷의 잠재성을 동시에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규약들’”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한편 카질리 선생님은 현대 사회에 들어 사생활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발표문에 의하면, 이제 “사생활은 개인적 권리이기를 그치고 집단적 교섭a collective negotiation”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플랫폼 위에서는 아무도 ‘외따로 혼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자신들에게 고유한 사생활에 대한 배려를 표명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네트워크 상호작용이 점점 현저해지는 현상은 이해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율성의 영역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한 특정한 전략적 욕망을 펼쳐 보이는데 힘을 더해주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사생활은 개인적 특권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집단적 교섭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요인들을 고려하여 한 개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신호들을 고려하면서 형성된 관계적 구도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온라인 사회적 플랫폼과 모바일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개된 관계망 안에서의 사생활은 그것이 탈중심화되고 복합적이며 다방향적인 프로세스를 갖는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카질리 선생님은 “사생활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privacy”를 근본적으로 반대하며, 사생활은  [복수적 개인들의] “자율성과 자유들을 존중하는 구도 내에서 열리는 집단적 관심으로서 구상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두 분의 견해가 두루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디지털 독점기구들에 의한 사적인 것의 착취는 무차별적이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사생활의 보호’라는 기치를 들고 시행되고 있습니다. 전자의 상황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당위적으로 안티고네Antigoe와 같은 태도를 단호히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상황에 비추어볼 것 같으면 우리는 자칫 사적인 것의 옹호가 유해한 환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진실한 관련에 대해서 모색을 해야만 합니다. 상황의 성격에 따라서 우리는 두 태도를 가변적으로 운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러한 미묘한 문제들을 야기한 작금의 사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려고 합니다. 오늘날 사생활의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사용자들이 스스로 사적인 것을 공공 광장에 무분별하게 노출하는 현상입니다.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용자 자신의 욕망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 사적인 것들은 공적인 욕망으로 잔뜩 달아 올라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문화심리학적으로는 헤겔이 명명했던 “사활을 건 인정투쟁”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서 전개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사회학적으로는 우리의 일상적 삶 하나하나가 공적 지평에 올라섰기 때문입니다. 정보화 사회가 처음 인류를 충격하던 20세기 말엽, 사람들은 ‘실시간 소통real time communication’과 ‘인터렉티비티interactivity’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가상현실은 실제 세계The Real World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연장extension’이자 ‘증강augmentation’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현상을 보고 그리스·로마 시대의 직접민주주의가 지구적 규모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품은 사람들이 꽤 되었지요. 즉 이상적인 상태에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순환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것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일 하나 하나가 공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것, 또한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의미심장하게 이해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가장 저변의 자리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서 사적인 것들은 본래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공공의 영역에서 보석처럼 빛나리라 기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소망은 배반당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발표가 고발하고 있듯이, 사적인 것은 공공 권력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훼손되는가 하면, 상업 권력에 의해서 무분별하게 공적 성질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일반 사용자들은 사적인 것들이 공적으로 수용되길 바라는 욕망에 달아올라 자신들의 낱낱의 삶이 공공의 사막에서 부는 회오리에 휩쓸려 난폭하게 망가지는 사태를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러한 사태 뒤에 매우 은밀한 논리적 장치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비유로 그 문제를 암시해보고자 합니다.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아니 마르크스 자신에게, 사용가치use value와 교환가치exchange value는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소거시켜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상품과 상품의 관계로 변질시킨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사물화reified’된 존재로 전락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의 이론적 근원이 이 가치론의 단순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립적인 것일까요? 간단히 하나의 상품을 머리 속에 떠올려 봅시다. 그 상품의 가격은 그것의 쓸모가 보장해주지 않나요? 다시 말해 교환가치는 사용가치가 보증해주지 않으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충적인 관계에 놓이듯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역시 ‘공모’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그러한 공모 관계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개념적인 명명을 통해 이해시킨 것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였습니다. 그는 ‘기호 교환 가치valeur d’échange signe’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하나로 묶어서 협력하도록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비유이긴 합니다만 우리의 문맥에서 사적인 것/공적인 것은 사용가치/교환가치와 유사한 구석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적인 것을 순수한 본래적 가치로서 해석하고 있고 공적인 것이 그런 사적인 것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억압적인 장치로 기능하는 것을 두고 개탄해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에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이상적 관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현실에 의해서 참담히 배반당하고 있다면 여기에서도 보드리야르의 ‘기호교환가치’와 같은 매개 개념을 찾으면 이러한 사태를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제가 보기엔 매개 개념이 아니라 두 개념 사이의 착시가 여기에 작동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디지털 문화가 전 시대의 책 문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면 중의 하나는 생산 차원과 수용 차원이 원천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문화의 기본 구성형식인 분해와 합성을 수행하는 알고리즘은 아주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프로그래밍 언어를 알고 작성할 수 있는 인구는 소수의 전문가 그룹입니다. 페이스북, 구글 등 오늘날 인터넷 독점기구를 세운 사람들의 상당수는 바로 그 전문가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수용자, 즉 디지털 문명의 사용자들은 그 생산 기제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그것을 사용하고 향유하는 일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즐길 수는 있으나 만들 수는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게임에 중독된 자는 계속 놀고 싶어 합니다만 좀 더 나은 게임을 직접 만들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대신 그들은 생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디지털 문명의 특정한 장치 안에서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며, 문제점들에 직접 개입하고 해결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착시가 일어납니다. 생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디지털 시스템과 그 시스템 안에서의 다양한 참여 형식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전자가 컴퓨터의 운영체제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그 운영체제에서 돌아가는 각종 ‘엡’입니다. 후자가 실제적인 제도들institutions이라면 전자는 디지털의 기본 환경environment입니다. 제도들은 전문 생산자들에 의해 조성된 환경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환경 자체의 변화에 직접 개입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사용자들은 제도들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환경 자체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사용자의 손 끝에 닿기’라는 마이크로소프스 사의  한 때의 모토는 그 환상을 장밋빛으로 칠하고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실로 이 환경이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인류는 지금 디지털 인공 환경 안에 예속된 상태에서 자연 환경을 절멸로 몰아가는 위험스런 존재로 변해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는 환경에 이중으로 구속된 존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카질리 선생님은 에코-시스템eco-system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우리가 쇄신해야 할 대상이 바로 이 환경이라는 것을 적확히 지적하고 계십니다. 
여하튼 디지털 환경을 바꾸는 일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사용자들은 환경과 제도들 사이의 착시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사생활’을 없애려고 하는 국가 기구와 인터넷 독점 기구들에 ‘저항’하는 일을 넘어서서 해야 할 일이 더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생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공적’ 참여를 넘어서 공공 영역public sphere 자체의 친환경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적인 것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장소로서의 공적 장소, 혹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선순환적으로 유통되는 공적 장소로서 공공영역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공공 영역 자체의 갱신을 도모한다는 것은 사용자들 스스로가 생산자의 직능을 전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럼으로써 가능한 대안 공공영역들을 실험적으로 고안하고 지배적 디지털 환경과의 비교를 통한 검증 과정을 통해 디지털 환경 자체의 자기 진화의 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시도는 예전의 수정주의 운동가들이 ‘자주관리운동self-managing movement’이라고 부른 것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퍼스널 컴퓨터의 세계적 확산에 기폭제가 되었던, 스티븐 잡스Steve Jobs와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이 만들었던 ‘에플 II 컴퓨터’는 워드프로세싱, 계산기, 게임, 그리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라는 네 가지 기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에플 II’의 개발자들은 퍼스널 컴퓨터의 모형뿐만이 아니라 디지털 문명을 사는 사람들의 기본 활동양식들도 제시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용자들의 대부분은 디지털 기기를 계산기와 게임기로 사용하고 드물게 워드프로세서로 씁니다. 그리고 프로그래밍 도구로는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방금 제안한 사용자가 스스로 조성할 디지털 자주관리시스템 안에 이 네 가지 기제가 필수 요소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용자들이 디지털 문명을 사용하고 감시하는 걸 넘어서서 그 문명의 생산 알고리즘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학습할 때만이 대안적 공공 영역들을 제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항을 넘어서 자발적 계몽의 장을 사용자들이 스스로 열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