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지하와 김현의 우정에 대하여 본문

사막의 글

김지하와 김현의 우정에 대하여

비평쟁이 괴리 2022. 5. 14. 16:51

※ 아래 글은 인터넷 매체, '컬럼니스트' 5월 11일자로 발표된 글이다. '컬럼니스트'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하여

 

김지하 선생이 돌아가셨다. 편찮으시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소문으로 돌았지만, 선생은 끈질기게 죽음과의 줄다리기를 이어 나가셨다. 선생의 병을 걱정하시던 사모님, 즉 토지문학관의 김영주 관장님이 2019년에 먼저 돌아가셔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생전에 부부의 정이 무척 애틋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전 해 10월에는 박경리문학상 수상자 강연 때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까지 부부가 함께 오셨었다.

선생에게 죽음이란 무엇이었을까? 그이는 1980년 감옥에서 나오면서 민족문학 대신 생명사상을 들고 나왔다. 그이의 생명 사상에는 죽음에 반대하는 외침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선생이 겪으신 집안의 참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동학군이었던 증조부는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집안을 일으키려 애를 쓰던 할아버지는 노름에 빠져 가산을 날리고 가난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다 운명을 마감하였다. 공산주의자이고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음 직전에 전기 기술자였던 탓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물론 다른 동료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선생은 자라면서 숱한 시체를 보았다. 물고기들에게 파먹힌 보도연맹원의 시체도 보았고, 6.25때 뒷산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이 하얗게 쓰러져 쌓여 있고 또 끊임없이 그 위에 쓰러지고 있었던 것도 보았다(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1, 학고재, 2003, p.221). 그의 삶의 거의 팔 할은 이미 죽음이 장악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렇게 썼다.

 

“우리 집안 최고의 우투리 증조부의 슬픈 날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날들! 나의 날들! 선천先天에 반역하는 모든 삶, 모든 날을 지배하는 그 이상한 죽음의 이미지! 새하얀 소외의 이미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유배의 그 황막한,황막한 이미지! 나의 세계, 나의 깊고 깊은 번뇌의 뿌리!”(같은 책, p.30)

 

나는 이런 운명을 접할 때마다 내가 살아온 삶이 너무나 신기해서 되돌아보곤 한다. 19~20세기 사이의 한국인에게 절절한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서울에 유학 와서 처음 알았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서 사연이랄 게 없었다. 그런데 문학 쪽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억울하고 서러운 유년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동년배의 사람이 김지하 선생 주변에 있었다. 바로 나의 스승이신 김현 선생이다. 그이는 진도 출생이고 초중등학교를 목포에서 다녔다. 김현 선생은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부친이 남도 전체에 물건을 공급했고 서울까지 지점을 두었던 약종상을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김현 선생이 간간이 고백한 유년 시절에는 전쟁의 자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등장하는 6.25 체험에는 전쟁의 비극성보다는 낯선 피난민들과 만나 가졌던 신기함이 더 배어 있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 놓은 헌 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한국문학의 위상』, 김현문학전집 1권, p.39)

 

김현 선생은 이청준, 윤흥길, 김원일 등 6.25 체험을 깊이 있게 다룬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통해 6.25의 정신사적 의미를 자주 해부하였었다. 그런데 정작 평론가 자신의 체험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6.25에 대한 이 외부적 시선은 김지하의 내적 체험적 시선과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이런 대조에도 불구하고 김현 선생과 김지하 선생의 교류는 일종의 아공간(亞空間)’에서 긴밀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사정을 1995년경 김현문학비를 목포에 세우는 일이 있었을 즈음 김지하 선생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김지하 선생은 당시 이런 저런 이유로 김현 선생 추모 사업에 동참하셨고 그때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을 넘겨 주셨다. 그 중 하나는 김지하 선생이 시인지로 등단(1969)할 때 김현 선생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김지하 선생이 현이가 내 속을 다 들여다 보았어라고 하신 말씀은 더욱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김지하의 시에 대한 본격적 비평문인 속꽃 핀 열매의 꿈- 김지하에게(문예중앙, 1986년 가을호, 김현문학전집 제 7, pp.57~67)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 글은 무화과라는 시 한 편에 대한 분석이었는데, 한 개인의 출세의 욕망이 보편적 인류애와 부딪치며 내는 생각의 울림과 공명하는 과정이 꼼꼼히 실연되고 있었다. 김지하 선생이 말한 내 속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이, 아니 마음이 뜨겁게 진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후배 비평가들에 의해 공감의 비평의 모범적인 사례로 자주 국문학 수업의 교재로 쓰이곤 하는 글이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게 가지 않은 길들이 엇갈려 있었던 것 같지만 심층적으로는 내밀한 전류가 어떤 알 수 없는 도관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마다 목포에서 열리는 김현 문학 축전을 주관하는 시인 박관서씨는 축전을 즈음하여 나와 만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김현과 김지하가 대학생 시절에 목포 중앙로에서 만나 나는 투쟁할 테니까, 너는 문학해라잉이라는 말을 김지하 선생이 김현 선생에게 하면서 술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목포에 널리 퍼져 있다는 말을 하곤 하였다. 아마도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서 문학과 정치가 결코 깔끔하게 갈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김현 선생은 문학의 정치성을 차곡차곡 짚어 본 바 있으며, 김지하 선생의 반독재투쟁은 무엇보다 문학의 형식으로 실행되었던 것이다. 박관서 씨라고 그런 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았을 리 없다. 다만 그는 목포 중앙로를 스스로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교류에 대한 일종의 비유로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교류는 우리가 정밀히 해부해야 할 비밀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문학과 정치가 융합하는 여러 가지 양식의 오묘한 축제를 이루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말은 김지하 선생의 저항성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또한 그의 민족주의와 생명사상 사이의 연결망도 그리함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 점에서 김지하에 대한 바른 연구는 이제 출발선에 선 셈이다. 김현 선생을 포함해 김지하 선생이 나눈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탐구 역시 그러하다. 선생의 죽음은 인간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탄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 점에서 선생에게 죽음은 생명의 일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이를 평생 사로잡았던 죽임의 현실로부터 스스로의 문학적 삶의 실천을 통해 벗어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는 것을 그대로 가리킨다. 선생은 투쟁을 통해서라기보다는, 투쟁을 포함하는 삶을 통해서 생의 가치를 입증하였다. 그것이야말로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벅차게 하는 까닭이고 생의 기획을 새로이 여미게 하는 실마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