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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글

정명환 선생님을 처음 뵙던 시절의 이야기

비평쟁이 괴리 2022. 6. 12. 12:19

※ 아래 글은 지난 3월 18일 돌아가신 정명환 선생님에 대한 추모글로서 '현대문학' 5월호에 발표되었다. 과월호가 되었기에 블로그에 싣는다.

I. 입학한 지 1년 반 후, 불어불문학과에서 강의를 듣다.

 

1975년이었다. 한국이 한창 경제성장 중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고 반은 농촌이고 반은 도시인 동네에서 자라면서, 대충 어림해서 사회적 야만 상태를 거의 벗어나지 못한 수준을 맴도는 나이에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3월에 입학식을 치르고 학우들과 통성명하고 수업을 하면서, 나는 한국의 대학 신입생은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대학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아서 그것을 딛고 보다 높은 지위를 향해 뜀뛰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대학을 고등학교 때까지 대학 입학을 위해 묵혀두기만 했던 온갖 앎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줄 현자들의 아카데미라고 생각했던 학생들이다.

신입생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첫 번째 부류의 학생들은 이미 자신이 갈 길과 방향과 도중에 에너지를 충전할 도시락도 다 준비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 오로지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어쩌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게 된 사람들이다. 애초의 기대와 달리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이들은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데모에 휩쓸리게 되고, 혹시 배울 게 있을까 싶어 가입했던 학회 선배로부터 기성세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반복적인 세뇌를 받게 된다.

현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말 잘하던 선배가 혹시 그이인가 싶어서 졸졸 따라가 보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아르바이트를 가야 한다며 혹은 고시를 준비해야 한다며 데모대를 떠나 버리거나, 아니면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계책을 세우느라 시간이 없다고 후배에게 레포트를 부탁한다.

할 수 없이 도서관에 가서 유일하게 개가식(開架式)으로 운영되던 2층에서 이책 저책 뒤지면서 진리의 말씀을 구하지만, 지침도 없고 방향도 없어서 그저 책들의 망망호수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부표(浮標)’같은 걸 건진 게 천운이었다. 19762학기에 나는 불문과(佛文科)로 진로를 정했으니, 그건 진정 확고한 결심이었다. 몇 권의 책들이 그 결심에 징을 박아 주었다. 고등학교 때 가고 싶었던 국문과가 차지하고 있는 1동의 긴 복도를 지나 2동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끝까지 가면, 거기에 불문과 사무실이 있었다.

그곳을 거점으로 주변에 위치한 어느 강의실에서 나는 정명환 선생님의 불문법 강의를 들었다. 명쾌하고 적확한 강의였다고 기억한다. 명쾌하다는 것은 고등학교 3년 불어를 배운 덕분에 겨우 들릴락말락하게 트인 귀가 말끔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셨다는 뜻이다. 적확하다는 인상은 불문법의 난관인 조건법과 접속법의 용도와 활용을 분명하게 알려주셨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무척 겸손하셨다. “내가 뭘 아나?”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말씀이 몽테뉴의 “Que sais-je?”가 담은 만큼의 두터운 심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낸 것은 아주 오랜 후이고, 당시에는 그저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잘 모른다는 말을 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II. 19773학년 때. 선생님은 방자한 학생을 연구실에서 맞아주셨다.

 

그리고 다음 해, 나는 과격성의 겉멋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1학년 때의 소년 풍의 들뜬 기분의 데모와는 사뭇 다른 현실 부정의 제스처를 취하곤 하였다. 바깥 세상은 1975긴급조치 9가 발동된 이래 점점 더 숨막히는 상황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데모를 주동한 학생이, 고개가 젖혀지고 팔이 뒤로 꺾인 채로 면전에서 끌려가는 꼴을 여러 차례 목격하고도 아무 말도 못했다. 중앙정보부의 프락치들이 교내에 상주하다가 잡아가야 할 학생을 경찰에게 찍어주는 장면도 보았다. 그런 상황이니 이른바 근본적radical’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는 절박감이 마음을 짓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근본성 the radical’에 대해 내렸던 정의, “근본적이 된다는 것은 문제의 뿌리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당시에는 마르크스의 문헌은 구할 수 없었고, 막 도입된 복사기 덕택에 루카치의 책들 일부를 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저 말을 나는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에서 처음 읽었다.)라는 말 그대로, 그 당시의 어린 학생들은 자신의 인간됨에 대한 초자아의 시험에 들기를 스스로 자청하곤 하였다.

그런 생각으로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나는 당돌하게도 교수님들을 찾아 다녔다. 아마도 목 디스크를 유발할 법한 강박관념을 벗어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 의무감을 청동처럼 염통 밑바닥에 부려 놓으며 득달하던 선배들의 요구와는 다른 말씀을 듣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나를 강요하는 것들에 이미 지독히 감염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수님의 연구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 다짜고짜로 역사와 혁명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당황한 교수님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에, 저 선배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강변했던 기성 세대의 무능과 비겁함의 또 하나의 사례를 마음 속에 노트하는 희열을 누리고 싶어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교수 연구실들이 줄을 잇고 있는 3,4층의 복도를 배회하고 다녔다. 정명환 선생님의 연구실에도 급습을 하듯이 들어갔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의 살똥스런 질문에 너무나 자상한 답변을 해주셨고, 역습을 받은 처지가 된 내가 허겁지겁 데퉁스런 반론을 내뱉다가 결국은 얄팍한 지식 지갑이 밑천을 거덜내는 꼴을 당했던 것이다.

내가 애초에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 통제 상황으로 미루어 역사혁명에 관한 지식을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 걸 아는 분은 수업 시간에 마르크스를 입에 올리고, 독재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후진국 경제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설파해주시던, 그리고 그런 저항적 행위들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한, 몇 안 되는, 요즘 식으로 말해서, 스타 교수들 뿐이라고 나는 암암리에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학생들은 서울의 유수한 대학들에 띄엄띄엄 분포된 그런 교수님들을 찾아 1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버스를 타고 원정 수업을 다니곤 하였다.

그런 착각은, 마치 처음 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서, 당시 내가 입학한 계열 학생 수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던(그렇게 기억되는데,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수가 엄청났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K 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만 잘할 뿐 운동이나 노래 등등, 여타의 문화적 교양 점수는 제로일 거라는 나의 멍청한 편견을 되풀이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중에 만나서 직접 보니, 그들은 거꾸로 팔방미인들이었고, 나야말로 촌놈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문제의 K 고등학교 출신이면서 그 학교에서도 드문 천재로 소문이 났던 정명환 선생님은 물론 그 이상으로 모든 걸 알고 계셨다. 나는 막연히 선생님을 사르트르 전공자로 알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사르트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프랑스의 요란한 철학자가 일정한 연대를 맺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를 훤히 파악하고 있고, 또한 그뿐만 아니라, 서양 철학과 문학의 맥락과 분포와 지형을 기본 지식으로 내장하고 있을 것이라 가정하는 게 타당할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 정치의 통제와 검열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영어, 불어, 일어에 능통하셨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지식의 흐름을 시시각각으로 수집하고 계셨던 것이다.

다만 선생님은 소위 미국의 고위직업군이 흔히 취한다고 하는 ‘Know-It-All(난 다 알아)’의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는 포즈를 취하는 법이 전혀 없이, 앞에서도 말한 겸손한 자세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계셨기 때문에, 내가 선생님의 진면목을 낮추어본 셈이 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의 시선에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내장되어 시야를 굴절시킨 왜곡된 심사가 작용한 탓이 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왜곡된 심사는 하룻강아지 서울대학생들이 흔히 품는 것으로서, 자신이 소속된 대학교의 권위를 제 몸 안에 투영하여, 마치 자신이 세계의 모든 것을 관장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고 오해하는, 요컨대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 서울대학교의 상징어이다.)를 뒤집은 숨 룩스 베리타티스 Sum Lux Veritatis(내가 진리의 빛일지니)’의 권화임을 뻐기는 자기 환상을 말한다. 이 환상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가 주워 모은 서푼짜리 지식을 가지고 세상 전체를 다 이해하고 있다는 식의 야비다리를 치게 마련인데, 내 무의식 속에서 그런 충동이 작동하였기에, 게꽁지 주제에 난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학 시절을 지나 대학원을 거쳐 사회에 나간 이후에도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고, 나 자신이 훗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이 하룻강아지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자들의 품평에 한없이 시달리고 말게 되니, 이야말로 인과응보의 전형적인 사례라, 내가 그에 대해 불만을 품을 수가 없는 것이다.

 

III. 1977-1978. 선생님, 제자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시고, 소통로를 여시다.

 

무례한 방문들에도 불구하고 정명환 선생님은 나를 항상 따뜻하게 받아 주셨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대학생들의 정신적 고뇌를 이해하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72년의 유신과 대통령 선출기구로서의 유정회의 설립,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5년의 긴급조치들... 정치적 억압이 누적되면서 1977년은 그야말로 학생들에 대한 압제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학교는 굴러갔고, 그 수레바퀴를 타고 세상에 진출할 사람들은 어김없이 대학교라는 이름의 그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또한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 수레바퀴 밑에 깔려서 신음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시절이든 젊은 세대는 이렇게 양극으로 갈리기가 일쑤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 스텍트럼의 범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대체로 어느 한 극에 위치하거나, 아니면 두 개의 극단을 태엽이 망가진 시계추처럼 불규칙하게 왕복하게 된다. 반면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분도 있지만 대체로 정중앙 부근에서 침묵하고 있게 된다. 오늘날처럼 언로가 자유롭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 침묵은 광장(아고라)과 도서관에서의 사건을 비롯 학생들과 권력 간의 충돌에 대한 비자발적인외면으로 이어지곤 한다.

학교 안에서 정명환 선생님은 두 개의 극단 중 하나를 택하시지는 않았다. 다만 선생님이 양극단의 스펙트럼과 그 긴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셨다는 것은 당시 선생님이 19772학기에 학과장으로 취임하시면서 취하신 행동으로 알 수가 있다. 선생님은 과대표를 불러 학생들과의 간담회를 만들었다. 구체적인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데 널찍한 공간에 넓은 사각형으로 책상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그 한 변의 중앙에 앉으셨고, 학생들은 자유롭게 이곳저곳에 앉았다. 몇 가지 다과들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간담회 자리에서 선생님은 학교 생활에서의 고충과 앞으로의 학업 및 진로, 그리고 학생들 개개인의 고민들을 모두에게 말을 청하여 귀담아 들으셨다. 물론 거기에서 정치적인 발언들이 오고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마음의 고난을 표면으로 노출시켜 그것이 적절히 해소될 길을 학생 스스로 찾아가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당시의 저항적 정신 자체가 상대편의 적 성질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매우 심각한 비과학적 오류들을 내장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오류들이 축적이 되다 보니, 우리 세대에선 그 모순이 격화되지 않아, 마차에 올라타느냐 바퀴 밑에 깔리느냐의 선택의 차원에 머물렀지만, 다음 세대로 가면 이른바 내로남불의 형식으로 또 하나의 쌍두마차가 출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걸 지금 적나라하게 목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무언가를 교시하는 게 아니라, 학생의 지적 자립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며, 그 관점에서 본다면 간담회를 열었다는 사실 자체가 절묘한 이성적 고안이었다고 해야 하리라.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온 제자 중 상명대학교의 윤종범 교수는 나보다 1년 아래 학번이었는데, 정명환 교수님에 대한 가장 소중한 추억을 학과장을 하시면서 학생들과 자주 교류하셨던 데에서 찾았으니, 내 말에 추호의 과장이 없음을 독자들은 알리라.

그리고 19787월 정명환 선생님의 첫 비평집, 한국작가와 지성(문학과지성사)이 출판되었다. 나는 비로소 선생님의 지적 광상의 엄청난 두께를 보았다. 특히 이상론인 부정과 생성은 나를 완벽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이후 나는 선생님이 1950~60년대 한국 최고의 종합 교양지였던, 사상계의 편집위원을 지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비롯, 선생님의 놀라운 지적 편력과 도전을 시시각각으로 접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 지식인 정명환에 대해서 말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허용된 지면 수를 넘겨 버렸으니, 어찌할까나, 펜을 거둘 수밖에. 다만 나는 작년 여름에 출간된 선생님의 마지막 저서,프루스트를 읽다(현대문학사)를 계기로 지식인 정명환을 한국지성사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작업을 크세쥬Que sais-je?’의 정신 - 예외적 지성의 한국적 의미(문학과 사회, 2022년 봄)라는 제목의 글로 발표한 바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그걸 참조하기 바란다. 언젠가 그 글에서보다는 훨씬 친근하고 체험적인 방식으로 그 지식의 횡단을 따라가는 원족을 행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니, 그것은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영혼이 여전히 즐거운 지식의 숲속을 날아다니는 정령으로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계시리라 믿기에 품는 것이다. 영구 박동의 지식 심장의 원천이시여, 제게 무한 각성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