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제 56회 동인문학상 심사를 시작하며 본문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6회 첫 번째 독회의 결과로서의 알림글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동인문학상 제56회(2025년) 독회를 시작한다.
이 진술에서 ‘제56회’는, 동인문학상 출범(1956) 이후, 1968-1978년 간의 중단 기간을 제외하고 지속된 회기의 마지막 순번을 가리킨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회기’란 심사를 진행한 회기이다. 따라서 수상작이 없을 경우에도 회기에 포함된다(1963년 제 8회의 경우.) ‘2025년’라는 것은 이 회기의 해당 년도를 가리키는데, 실제로 한 회기의 검토 대상은 전 해의 8월부터 해당년의 7월 사이에 출간된 작품으로 경계가 그어진다. 2025년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2025년에 시상한다는 것(통상 11월)이다.
제 56회의 첫 독회는 지난 해 12월 26일, 창경궁 근처의 '송죽헌'에서 열렸다. 독회 대상 작품은 2024년 8-9월에 출간된 작품들로서, 200자 원고지 600매 이상의 신작 장편소설 혹은 신작 소설집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장기간에 걸쳐 여러 권으로 출간되는 대하소설 급의 작품은 완결된 시점에 검토 대상이 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청소년 소설이나 아동 문학은 배제된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첫 독회에 검토된 대상은 40여편에 달한다. 황지윤 기자가 정성스럽게 톺았지만 아마 누락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숫자는 심사위원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양이다. 2020년경 일간지가 인터넷 중심의 신문으로 전환한 이후 동인문학상 독회제도는 2000년의 혁신이래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현재의 형태로 동인문학상이 도약한 건 2000년 무렵이다. 그때 ‘매월 독회’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처음의 형식은 심사위원들이 각자 주목한 작품들을 거론하며 상호 토론을 거쳐서 후보작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 토론의 결과는 담당 기자가 요약해 기사로 실었다. 처음부터 2010년대까지 그 형식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는데, 2022년도부터 담당기자가 모어 온 작품들을 심사위원들이 검토하여 각자 우선순위를 정한 후 독회 모임에서 상호 토론 끝에 작품을 선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선발된 후보작에 대해서 심사위원 전원이 독회 평을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심사위원 전원이 후보작들 모두에 대해 썼으나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각자 선택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2000년 무렵부터 2010년대까지는 썩 낭만적인 시기였다. 그때에는 심사위원들이 큰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고 말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고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은 말 그대로 ‘심사 노동자’로 지위를 바꾸었다. 그렇지만 보상 체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도서 구매대금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쾌적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동환경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단이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김수영이 말했듯이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놓”을 글읽기-쓰기의 ‘폭포’ 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 아니다. 개별 심사위원의 경우, 그런 숭고한 몰입을 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한국소설의 향방을 가늠하고 그 가능성의 최대치를 길어내기 위해 참여한다는 본래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는 건조한 이유에 의해서이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흐름에 힘입어 그런 약속은 이제 오로지 행동을 통해서만 입증되며, 심사자의 권위 역시 그 행동의 사후적 결과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시대는 어쨌든 와야 했을 ‘때’이고 진화의 항진에 적합한 회로를 따라온 것이다. 예전의 안식을 그리워할 기회는 사라졌다. 그러니 힘든 몸을 이끌고 또다시 글 노동의 출발선상에 서게 된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단은 모두가 동등한 지위에 위치해 있으니, 필자가 그들을 대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약속을 묵묵히 수행하는 동료 심사위원들에게 무한한 경의를 보내며 다시 한번 노역의 의무에 대한 약속을 되새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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