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세계화 속에서의 한국문학의 방향 본문
※ 이 글은 2015년 ‘파리도서전’(3월 16-21일)에서 발표된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한국은 동북아시아 3국 안에 위치해 있다. 옆에 있는 두 나라는 정치·경제적으로 강국인 데다가 문화적으로도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에 자신을 알려 왔다. 서양인들은 중국과 일본의 특징들을 꼽는 데 익숙하다. 중국의 미술에는 도가적 신비주의가 있다거나 일본의 문화는 “기호의 제국”, 즉 정교한 인공성의 문화라는 등 말이다. 그런 판단과 함께 한국의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한국문학에 대해 고유한 특성을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아주 오래전부터 전래되어 온 한국문화는 분명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의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한국문학은 전통적인 한국 고유의 것에서라기보다는 보편적이라고 이해되어 온 문학을 지향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경향이 꽤 보편주의적이라는 말은 흔히 듣는 얘기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문학보다 더 서양인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예로 들어 보겠다. 한국 영화가 세계에 처음 소개되기로는 임권택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이었다. 그 영화들은 전통적인 한국 음악과 미술에 바탕을 둔 매우 정적인 작품들이었다. 임권택의 영화는 서양의 비평가들에게 주목을 받았으나 대중들에게 호응을 받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곧바로 홍상수 · 김기덕의 영화들이 서양의 영화 관객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화는 한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말고 오히려 영화의 첨단 미학을 구현해냈다고 흔히 평가되었다. 지금 프랑스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재즈 음악 가수 나윤선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의 재즈 음악의 독창성은 서양음악을 하고 있는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하위 문화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는 소위 K-pop 댄스음악과 드라마를 생각해 보자. 이들의 음악과 무용, 드라마는 한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대중문화의 아주 일반적인 속성들을 자극적으로 가공한 것들이다.
이러한 예들은 한국문화의 보편지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문화에 고유한 전통성이 없다기보다는 오늘의 한국문화가 세계 공통의 일반적 경향을 독자적으로 가공하는 데서 눈길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가 있다. 처음 서양인들은 한국문학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가를 궁금해 했다. 그러나 곧바로 문학 고유의 세계에 대한 ‘성찰적이거나 비판적인réflexive ou critique’ 특성이 한국문학의 중요한 특성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1990년대 초엽에 번역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Ce paradis qui est le vô̂tre』은 ‘문둥병’이라고 하는 질병의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 세계의 지배와 예속의 역학 관계, 자유와 사랑 사이의 갈등을 성찰하였다. 200년대 초엽에는 본래 서양으로부터 발원했으나 오늘의 서양인들이 거의 잊어가고 있는 ‘성과 속’의 관계를 탐구한 이승우의 『생의 이면 L'Envers de la vie』 등의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그러한 주목은 최근 출간된 『지상의 노래 Le chant de la terre』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젊은 세대의 해방 본능과 파괴 충동에 호응하였다. 004년 번역 출간된 황석영의 『손님L’invité』(2001)은, 한국전쟁 직전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기독교도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살육을 다룬 소설이었는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006년 한불수교 120주년을 맞아 프랑스 문인협회 사무실에서 한불작가들이 좌담을 가졌을 때, 르 클레지오씨는 한국문학이 프랑스 작가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앙가쥬망을 다시 일깨워주었다고 언급하였다. 다른 한편 성과 속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 들었던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La vie rêvée des plantes』(Folio, 2009) 및 『생의 이면L'Envers de la vie』 (2000년 출간, 2006년 번역, Zulma)이 한국문학의 정신적 모색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곧 출간될 그의 새로운 장편 『지상의 노래Le chant de la terre』(2012년 출간, 2016년 번역, DeCrescenzo Éditeurs) 역시, 세속의 추악함에 대한 성스런 각성을 모색한 소설로서, 본래 유럽적 주제였던 성과 속의 관계를 재성찰하게끔 한 한국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인정되리라 기대된다.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Saisons d’exil』(1983년 출간, 2013년 번역, Harmattan, 2016년 DeCrescenzo Éditeurs 재출간),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Interdit de folie』(1995년 출간, 2010 번역, Imago); 『강어귀에 섬 하나Sept méandres pour une île』(1999출간, 2013번역, DeCrescenzo Éditeurs)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기억’과 비슷한 ‘상상추론’을 통해서 지식과 현실 사이의 일치 가능성을 복잡한 문체를 통해 실험함으로써 프랑스 고급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주목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La végéterienne』(2007년 출간, 2015년 번역)는 억제할 수 없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탐미주의자와 무위로서의 저항을 상징하는 식물지향자 사이의 오해가 빚어난 특이한 그로테스크로서 이 또한 사회적 편견에 대한 도전으로서 읽혀야 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문학은 언뜻 특수한 민족적 소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주제를 통해서 세계문학에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주제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심층적 정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 거론된 작가와 작품들은 한국문학 고유의 모종의 미학적 흐름 위에서 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깊은 분석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의 차이와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통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을 짐작하게 하는 간단하고도 특징적인 한 현상은 한국문학이 다가가는 인류의 보편적 주제가 일반적인 대중 문화의 추세와 다르다는 점일 것이다(아마도 이 점이 ‘한류’와 ‘한국문학’의 차이를 가리키는 지표일 수 있다.)
특히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거의 30년 동안 세계문학이 점점 개인주의의 쇄말성에 매몰되어 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문학은 세계의 존속과 인류의 가치 있는 생존에 관한 거시적인 주제를 다시 보충함으로써 세계문학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점점 소중해지고 있는 문학의 기능은 반성적 기능이다. 삶을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묻는 것, 그것을 문학만큼 훌륭히 해낸 문화예술이 없었다. 오늘의 새로운 디지털 문화들도 막무가내식 즐김의 문화보다는 반성적 기능과 결합될 때 미적 가치와 지속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문학의 특성을 묻기보다는 세계문학 전반의 경향 속에서의 한국문학의 의미를 탐색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런 얘기를 통해 한국문학이라는 새로운 별이 세계문학의 은하 내에 자리잡기를 바랐고 요 근래 10여 년 동안 그런 일에 공을 들여왔다. 그 결과가 지난 해 출간된, 『한국문학의 어느 욕망 Un désir de littérature coréenne』(Decrescenzo éditeurs)이다. 그러니까 한국문학이 하나의 세계문학으로 들어온다는 것의 의미, 세계문학의 확장을 넘어서 세계문학 개념 자체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 한국문학이 할 수 있는 역할, 더 나아가 그런 작업이 결국 한국문학을 어떻게 진화시킬 것인가, 등등에 대한 내 나름의 고민을 모아 놓은 책이다. (20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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