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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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토론

비평쟁이 괴리 2024. 10. 30. 03:31

※ 1993년 8월 낙성대 근처에서 정정호 교수(중앙대 영문과)가 주회한 해외 문학이론 수용에 관한 발표에 대한 토론문이었다. 발표회의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진행을 맡고 계신 정명환 선생님이나 발표를 해주신 김윤식, 곽광수 선생님은 모두 제가 강의를 직접 들은 바 있는 스승님이십니다. 예전 같으면 스승의 그림자도 안밟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옆자리에 앉아 있으니 송구스럽기 이를 데 이를 데 없습니다. 서두가 좀 호들갑스러워졌는데, 학창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제게 몰려왔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대학교 1학년땐가 2학년 때 김윤식 선생님으로부터 뉴 크리티시즘 강의를 받은 적이 있었는 데, 바로 오늘 선생님께서 발표하신 내용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어찌나 감명을 받았던지, 그 이후에는 뉴크리티시즘의 ‘N’자도 안보겠다고 생각을 했었지요. 그런데 오늘은 제가 들었던 강의에 더 보태어 한국에서 뉴크리티시즘이 받아들여지게 된 배경을 말씀해주셔서, 옛날의 감동에 이해의 세례가 부어지는 느낌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뉴크리티시즘이 모든 면에서 불모한,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전후의 학문적 상황에서 방법론이자 동시에 세계관으로서 뉴크리티시즘이 대학에 도입되었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뉴크리티시즘이 파시즘적 세계관과 연결된 곡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뉴크리티시즘은 어떤 세계관과 연결되었을까요? 사는 세상이 달랐던 만큼 분명 어떤 변용 혹은 변형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마저 그 강의까지 들었으면 하는게 제 바람입니다. 그리고 곽광수선생님께도 질문을 드리고 싶은 데요. 선생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내용은 너무도 쓸쓸한 자기 반성과 자책으로 꽉 차 있어서, 저희처럼 윗분 선생님들을 거대한 산맥으로 여기던 사람에게는 조금 어리벙벙하고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4.19세대의 외국문학 연구가 결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인스트루먼트, 즉 도구의 부재에서부터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4.19세대, 그리고 한글세대인 선생님들께서는 도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더라도, 생활이라고 하는 거대한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들 세대는, 몸으로 싸워서 세상을 바꾼, 비록 정치적으로는 좌절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어쨌건 하나의 거대한 한국적 문화의 패러다임을 이루어내셨고, 그 뒤에는 ‘생활’, 다시 말해 이론과 실제를 하나로 일치키실 수 있었던 그 삶의 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바꿔서 말씀드리면, 선생님들 세대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것들을 체화해서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서툰 수용이나마, 외국이론을 단순히 모방해야 할 선진국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의 정황과 풍토 속에서 적절히 가공되고 변형되어야 할 참조의 틀로 활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선생님께서 구조주의의 수용이라는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구조주의라는 레텔이 붙은 책 두 권을 가지고 나와서 말씀하신 것은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체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구조주의라는 이름을 굳이 붙이지 않았으나, 그러나 구조주의적인 방법론을 우리식으로 변형한 많은 실제 비평들, 이론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까지 검토해 주셨더라면 실질적으로 수용의 구체적 양상이 보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또 하나, 구조주의나 뉴크리티시즘에 속성처럼 내재하는 소위 ‘꼼꼼한 읽기’를 지향하는 경향의 강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뉴크리티시즘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구조주의에는 애초의 출발 때부터 두개의 기본적인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의미의 명확한 짜임을 지향하는 경향, 즉 의미구조의 단일성을 목표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구조의 두께를 지향하는 경향, 즉 작품이라는 구조와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마음의 구조가 서로 어울려서 어떻게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 경향을 두고 어떤 분은 대구조주의와 소구조주의로 구별하시기도 했는데, 아무튼 문학연구라는 것이 의미구조의 단일성을 향해 있는가, 아니면 의미의 두께를 향해 있는가 하는 것은 외국이론의 수용의 문제와 여러가지로 연관되어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199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