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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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살점 혹은 살점인 상에 대하여

비평쟁이 괴리 2024. 12. 13. 09:55

※ 이 글은 1992년 현대문학상 비평 부문에 대한 수상 소감으로 씌어진 것이다.

가끔 머리 속에 입력되지 않은 단어들이 불청객처럼 전정기관을 타고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가르가멜이 소 내장을 과식하고 가르강튀아를 낳았던 그 통로 말입니다. 한 우주가 빠져나간 구멍인 탓에 옛 사람들은 결코 남의 시선을 끌 일이 없는 거기를 자주 청소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생식의 신이라면 늘 데리고 다니는 문지기 사자도 없어서 이 동굴 안으로 온갖 물질들이 들락날락 거립니다. 하긴 그것들도 우주의 일부입니다. 우주란 본래 먼지 덩어리 아닙니까.
아마도 제가 난처해 한다면, 그것은 문화 제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제도의 한 살점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일 터입니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듯이, 현미경을 시료대에 놓는 방법을 찾는 숙제가 제게 떨어진 것입니다. 하긴, 세상에 대한 활동은 모두가 세상의 활동입니다. 일찍이 서양의 철학자가 그 점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호들갑이 눈쌀을 찌푸리게 해드릴까 두렵습니다. 한데, 여기에도 그 두려움이라는 괴물이 있습니다. 제가 두려워 한다면, 저 살점을 ‘이모집’에서 혹은 ‘예술가’에서 질펀하게 나누고 난 다음에 제 몸에 닥쳐 올 파국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국의 시간을 채울 별의별 지청구와 청구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파국 직전에 있을 통음난무의 유혹을 이기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은 다정(多情)이 병이자 약인 고장입니다. 정이 좋을 때가 너무 많아서 정이 나쁠 때는 망각의 강에 수장되기 일쑤입니다. 정은 힐난이나 침묵으로 갚을 수 없는, 오직 정으로만 갚아야 하는 까다로운 선물입니다. 그 선물이 선물 주는 사람의 살점이기 때문입니다. 정은 죽음과 부활의 교환입니다. 이 정을 준 분들에게 정을 받은 사람이 진 빚이 너무 큽니다. 그걸 언제,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막막합니다.(199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