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가속적 역사의 기름인 저 ‘쾌락 원칙’을 넘어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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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적 역사의 기름인 저 ‘쾌락 원칙’을 넘어서

비평쟁이 괴리 2024. 12. 13. 09:53

※ 이글은 1992년 제 4회 ‘소천비평문학상’ 수상 소감으로 씌어진 것이다.

제가 소천비평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당황함을 여러분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변변찮은 글이 상을 받을 만한가가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제가 그려온 짧은 비평의 궤적이 도통 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문화제도 사이의 관계에 더듬이를 대고 분석적 행위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런 향연에의 초대는 자신이 친 그물에 직접 걸리는 시험 앞으로 그의 등을 얄궂게 떠다밉니다. 그러나 그 손바닥은 부드럽고, 그것을 통해 제 마른 심장을 적시며 들어와 퍼지는 것은, 다정이 병이지 않은 분들의 저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격려입니다. 그 넘치는 따뜻함은 실은 그것이 문학의 오래된 소중한 덕목임을 저에게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다시, 문학성을 논한다」 가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눈에 띠었다면, 아마도 제목이 큰 점수를 보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시 돌이켜보니, ‘다시’라는 말 속에 선정적인 유혹을 불어넣으려고 저는 꽤나 도슬렀던 듯합니다. 그 두 음절짜리 부사는 오늘의 세상을 휘몰고 있는 이른바  역사의 가속화 에 대한 일종의 차단 표지판일 수도 있고, 문화제도의 주변으로 점차 밀려나고 있는 문학을 여전히 대문자로서 표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읽힐 수도 있으며, 또한 만일 그런 게 있기는 하다면, 문학의 본질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문학은 사방에서  뒤로 돌아 라는 구령을 외치기 때문입니다. 아니, 외치기보다는 끊임없는 밀물 역사의 차량으로 팬 곳곳의 구렁들 자체가 바로 문학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학은 약진하는 세상의 헤진 자리며 파편이고 잘못 낳은 사생아입니다만, 바로 그것 때문에 쏜살같은 세상을 덜컹거리게 하면서 그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뿌리를 묻게 합니다. 예전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잃어가고 있는 문학이  멋진 신세계 가 도래할 훗날에도 여전히 버리지 못할 그만의 고유한 모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러한 뿌리를 들여다보기, 다시 말해 가속적 역사의 기름인 저 ‘쾌락 원칙’을 넘어서 죽음의 자리로 되풀이 회귀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소천선생님을 모릅니다. 아니, 돌아가신 제 스승을 문단에 추천하셨다는 것과 어느 글에선가 스승이 소천선생님을 두고 “떠돌이로 일제 식민 치하에서 항의하”였다, 라고 쓰신 것을 신비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문학에 대해서는 관념비평과 기교비평을 비평하고, 세상에 대해서는 정치적 야만주의를 부단히 고발한 그 떠돌이 항의자가 “작가 자신이 실제로 체험하는 무한정한 고민과 불안을, 또는 절망적 오열을 여실히 반영하는 문학”을 주장하셨다는 것을 저는 최근에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저의 작업이 소천선생님의 그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즐거웠습니다. 언젠가 ‘있을 수도’라는 한정구가 빠진다면, 그때 소천비평문학상을 마련하고 주관하시고 지켜보시는 모든 분들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저의 마음 속에 내내 짐으로 남을 것입니다.(199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