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4․19세대의 고뇌와 이상 -최일남의 『숨통』 본문
는적거린다. 여름산처럼 솟아오르던 정열은 간 곳 없고, 좌절한 한 세대의 온몸에 종양이 돋고 고름이 흐른다. 오로지 열정,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후 깨진 블록이 흩어져 있는 가로를 청소하며 나라의 장래를 정치가들에게 넘긴 학생들의 순수 이상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학습이 유일한 뿌리였다. 그것은 삶의 뿌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권을 거저 얻은 낡은 정치가들의 혁명 왜곡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 고 군사 쿠데타의 무력 앞에 무력했다. 그것이 통념이다. 작가도 그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4․19 주역들의 뒷 삶, 사회인으로서의 세상살이가 주동맥인 이 소설이 왜 필요했을까? 아마 작가에게는 그 통념을 십분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동곳을 빼지 못하는 무엇이 있었다. 5․16 직후부터 74년의 ‘자유 언론 실천 선언’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그 긴 시간 내내 하나의 계절에만 머물러 있다. 지루한 장마의 계절. 그 시간대에서 4․19의 주역들은 오래 방황하고 쉽게 변신한다. 혹은 언론과 대학에 적을 두고, 혹은 귀향한다. 혹은 수배되고, 혹은 말끝마다 ‘각하’를 입에 올리는 자리로 옮겨 앉는다. 변절하고 타협하며 침묵하고 제거된다. 그 앞에 무소불능의 무력이 있었다. 타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무력이 그 안에 동료를 고발하는 풍조를 심어주고 있었다. 침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는 건 탄식이다. 작품의 그 다변은 끝없이 꼬리를 무는 탄식의 음조로 늘어진다. 때때로 그 탄식 마저도 자기합리화의 제스처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여전히 고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한다. 작가는“안에서부터 무너져 가는” 이 숨막히는 정황 속에“ 안으로 깊이 침잠하면서 기층을 넓혀 나가는” “대항 의지”가 퇴적층을 이루고 있었음을 본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그 싸움은 우선, 도 덕성/실리의 싸움으로 드러난다. 타협한 자들의 실리주의와 고뇌하는 자의 도덕주의. 작가는,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실 리주의의 뒤에 자기 몸을 위해서는 모든 구실을 동원해 무슨 일이든 지 벌이는 반지성주의가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폭로하고, 그 도덕성 앞에 상호 존중의 합리주의가 새 삶에 대한 비전으로 놓여 있음을 밝힌다.
그 비전 위에서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이 준비되고 실행된다. 『숨통』은 4․19세대의 좌절과 고뇌와 자기 극복을 그 세대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4․19세대의 훌륭한 변호 론을 읽을 수 있고 4․19의 역사적 의의를 새삼 느껴 볼 수 있다. 그 러나, 그것은 이른바 4․19적 정신, 즉 순수 이상으로의 복귀 이상의 것이 아니다. 작가가 공들여 길어낸 ‘상호존중의 합리주의’는 윤리적 비전이지, 역사∙사회적인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재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4․19를 단순한 열정으로가 아니라 신생 독립국의 자존의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실제 깊이 있게 탐색되지 않는다. 작가는 거기까지 갔어야 했다. 그럴 때만이 한 시대의 고뇌와 꿈이 현재사 안에 당당히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 1989. 7. 26,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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