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기준영의 『사치와 고요』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기준영의 『사치와 고요』

비평쟁이 괴리 2020. 9. 3. 03:29

이 글은 20208월 동인문학상 독

회에 제출된 의견 중 일부분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이 글은 함께 실린 8월 독회 의견 전체, 특히 전반적 인상’(20208월의 한국문학, 바람 서늘)을 참조하면서 읽을 때, 그 의미를 좀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기준영의 사치와 고요(문학과지성사, 2020.07)에 실린 작품들은 소설적이라기보다는 연극적이다. 상황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유형화되어 있고, 대화와 지문들도 고전 비극의 무대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간결하게 정제되어 있다. 아주 일상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취하고 있으나 사실들이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부여한(혹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들이 부유하고 있다. 극장이 아닌 휑한 광장의 가면극이다. 이런 풍경을 작가는 스스로를 위한 광대의 세계라 칭한다. 이런 소설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외적 요인을 제하고 그 내적인 절실함만을 살핀다면, 그것은 작가가 눈앞의 현실과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기(혹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악몽의 기억처럼, 현실은 불가해한 뗏목 위의 조난이다.

 

“거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 너는 집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아파트는 아냐. 그냥 물 위에 떠 있어. 커다란 뗏목이나 판자처럼. 바람이 많이 불어서 위험해 보이는데도 네가 어딜 가겠다고 하는 것 같아.”

 

인물과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어긋남, 그것이 비극의 세계이다. 오늘의 상당수의 작가들에게 발견되는 유형화된 세계의 비밀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치와 고요는 그 수다한 작품들 중 잘 빚어진 항아리”(클린스 부룩스Cleanth Brooks의 그 유명한 표현 The Well Wrought Urn[Reynei & Hitchcock, 1947]을 빌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