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내가 평생 먹어왔고 먹을 비빔밥 본문
‘소울 메이트’가 말 그대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적으로 맺어져 있는 존재라는 뜻이라면, 내게 그런 사람이 점지되어 있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이른바 ‘케미칼’이 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건 DNA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미칼이 정말 잘 통해서 ‘소울 메이트’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분명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울 푸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나의 신체적 화학 성분들의 분포에 잘 호응하는 음식들은 있을 것이다. 반대의 음식들도 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머리 속에서 궁글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희미한 기억의 문을 열고 들어가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소년은 학교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참이다. 집은 텅 비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시골 학교에서 근무하시기 때문에 주말에나 오실 것이다. 동생들은 아직 학교나 유치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기척이 없다. 돌봐주는 누나도 동네 동무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강아지만 꼬리를 치며 달려든다. 볼 털 사이를 긁어주며 가방을 마루에 던지니, 배가 고프다. 오전반 수업을 마치고 돌아 와 마침 점심때다. 소년은 부엌에 들어가서 먹을 걸 뒤진다. 김치, 아침에 남긴 된장찌개, 콩나물국이 있다. 멸치, 콩자반도 있다. 소년은 양푼에 식은 밥과 함께 위 재료들을 넣고 고추장을 떠서 섞는다. 참기름이 귀해서 들기름을 뿌리고 숟가락으로 씨억씨억 비빈다. 젓가락으로 요리조리 헤쳐 가며 섞어서 각 식재료의 맛을 보존하면서도 종합된 맛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중에 결혼한 후에 집사람에게서 배울, 그때는 아직 알고 있지 못한 기교다. 무조건 숟가락으로 눌러 살짝 분쇄시키며 재료들을 삼투시킨다.
적당히 비볐으면 강아지 몫을 덜어주고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마당에는 아버지가 재배하는 채소들이 있다. 상치와 고추를 적당히 뜯고 따서 반찬 삼아 먹는다. 상치 안에 비빔밥을 넣어 먹기도 하고 그냥 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고추도 고추장을 찍어 먹는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신극신(以辛克辛)으로 삼는다. 물론 ‘신(辛)’이라는 한자어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전을 뒤적여 찾은 것이지 어린 소년은 전혀 알지 못한다. 소년은 이 ‘매운 맛’에 점점 중독되어가고 있다. 자신이 비빔밥을 좋아하는 이유가 매운 맛 때문인지 비벼 먹기 때문인지 헷갈린다. 물론 이 궁금증도 나중에 생긴 것이다. 그때야 그냥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이 뚝딱 먹었을 뿐이다.
비빔밥이 단지 소년의 허기를 채우는 일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소년의 마음을 뚫고 있는 공허감을 채워주는 역할도 해주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잦은 외지 근무와 그를 누르고 있는 공부에 대한 강박감, 텅 빈 집, 그리고 오후의 떨떠름한 햇빛. 이 이질적인 상황적 제재들은 우연히 그러나 빈번히 한 자리에서 만나 특별한 공간을 만든다. 소년에게 그 공간은 무언가가 무척 생경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한 그런 자리다. 이물스런 자아감에 시달리다 못해 소년은 그것들을 한 데 어울리게 하고 싶다는 충동에 조바심친다. 그러나 이 바깥의 환경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무기력과 조바심이 되풀이 되면서 소년의 내부에서 정신의 운동 기관이 털털거린다. 어느 순간 소년은 그냥 그대로는 처리할 수 없는 바깥 환경의 문제를 제 손 안의 사건으로 바꾸어서 해결할 생각을 한다. 공회전을 하던 운동기관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비빔밥은 그 손 안의 사건으로 선택될만한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렇게 비빔밥의 재료들은 무작위적으로 상황의 세목들을 대신할 수 있다. 소년의 숟가락을 통해서 낯선 질료들에 조화가 부여된다. 이 조화가 바깥의 어색함을 견디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소년이 비벼먹는 걸 아예 일용할 양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습관적인 취미로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성인이 되어 서울로 유학하고 취직을 하고 장가를 들고 애를 결혼시키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비빔밥이 선호 음식 1위의 지위를 놓지 않았다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도 없을 것이다. 아니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있다. 저 비빔밥의 밑자락에 깔리는 건 재료들의 개별 맛도 비빔 과정이 창출해 내는 종합 맛도 아니라, 고추장의 매운 맛이라는 것. 그것은 이 비빔밥이 가벼운 고통을 통과하여 증폭된 미감에 도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한참 후에 매운 맛의 묘미는 통증이 도파민을 분비케 함으로써 안락한 기분을 갖게 한다는 데 있다는 과학적인 설명을 소년은 알게 되겠지만 그 지식은 앞선 해석을 배반하지 않는다. 저 비빔밥의 가벼운 고통은 삶의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통과제의로서의 시련이 아니었을까? 그 고통이 없다면 하찮은 먹거리들에서 황홀한 맛을 뽑아내는 데에 이렇게 몰두하는 일이 한갓 유희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그것은 삶의 성취의 수준으로 격상된다.
비빔밥은 한국인들만의 음식이다. 모든 음식이 식재료들의 융합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식재료 자체가 음식인 경우는 비빔밥을 빼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식재료 자체가 음식이라는 것을 삶의 문제로 옮기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게 바로 우리에게 던져진 다양한 종류의 이질적인 삶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우리는 그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버무려 새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한국의 대중가요가 “조선의 민요에다 양악반주를 맞춘 그러한 중간층의 비빔밥식 노래”(「대담-신춘에는 어떤 노래가 유행할까」, 『삼천리』, 1936.2, 박애경, 『한국 고전시가의 근대적 변전과정 연구』, 소명출판, 2008, 266쪽 재인용)를 통해서 생장했다고 대중음악 전문가들이 흔히 지적하듯이 말이다.(20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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