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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달과 칼』(한양출판, 1993)의 작가는 몸 전체로 말한다. 이 말은 한갓 수사가 아니다. 몸으로 말한다 함은 삶의 구체성 속에서 언어가 솟아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작품의 시간적 무대는 ‘임진왜란’이다. 작가가 그리는 것은, 그러나, 장군들의 활약도, 외적을 물리친 조선 백성의 기개도 아니다. 모든 수난과 싸움과 승리가 어떠한 이념으로부터도 주조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생활사를 재구성한다. 그는 수난을 말하되 나라의 수난이 아닌 제 각각의 수난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싸움을 그리되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을 치러내는 고통 속으로 진입하며, 승리를 말하되 군사력의 승리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익힌 지식과 지혜가 어우러져 일구어낸 삶의 승리를 보여준다. 임진왜란이 민족의 수난이자 ..

『장한몽』(책세상, 1987)은 현대의 한국 사회가 심층에 깔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의 모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형이란 어사는 그냥 쓰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문제들이 제가끔 팽창되고 분화되기 이전의 원자적인 덩어리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 동등한 비율과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가 조직적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면서 자본/노동이라는 기본 모순의 문제를 중핵으로 하여, 다른 것들이 그 주위를 휘도는 통일적 질서를 수립했다면, 『장한몽』의 세계에서 분단, 노사 갈등, 성적 차별, 관료주의 등등의 모든 문제들은 다양하되, 미분화된 상태로 엉키고 뭉쳐 있다. 그리고 작품은 그 덩어리-문제를 인간의, 아니 차라리 생명의 기본적 생존의 문제에 수렴시킨다...

김승옥은 4․19세대의 선두 주자에 속한다. 4․19세대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세대이다. 그 이전까지 한국인에게 삶은 바깥으로부터 난입한 재앙이었다. 35년간의 식민지의 역사,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도적처럼 닥친” 해방, 좌 ∙․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한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로 이어진 20세기 전반기의 한국사에서 한국인의 삶 은 ‘타인에 의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저질러진 ‘타인의’ 삶이었다. 한국인은 어느 때에도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국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준 사건, 그것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4․19학생혁명이었다. 4 ∙ 19와 더불어 한국인은 마침내 ‘사람’으로서, 다시 말해, ‘창조적 주관 (creative su..

는적거린다. 여름산처럼 솟아오르던 정열은 간 곳 없고, 좌절한 한 세대의 온몸에 종양이 돋고 고름이 흐른다. 오로지 열정,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후 깨진 블록이 흩어져 있는 가로를 청소하며 나라의 장래를 정치가들에게 넘긴 학생들의 순수 이상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학습이 유일한 뿌리였다. 그것은 삶의 뿌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권을 거저 얻은 낡은 정치가들의 혁명 왜곡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 고 군사 쿠데타의 무력 앞에 무력했다. 그것이 통념이다. 작가도 그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4․19 주역들의 뒷 삶, 사회인으로서의 세상살이가 주동맥인 이 소설이 왜 필요했을까? 아마 작가에게는 그 통념을 십분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동곳을 빼지 못하는 무엇이 있었다. 5․16 직후부터 74년의 ‘..

1960년 10월 『새벽』 지에 『광장』을 처음 발표하면서 최인훈은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힌다. 이 진술은 그저 이 작품이 체제 비판적인 불온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깥으로부터 들어 온 두 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보여준 최초의 작품이라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광장』과 새 공화국의 관계는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4․19세대의 인식과 정서 그리고 동경이 통째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학적으로 그렇다. 문학적으로 뭐가 그렇다는 말인가?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