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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시를 읽으면, 생각은 같아도 느낌은 얼마나 다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김용락의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창작과비평사)는, 이런 명명이 가능하다면, ‘몰락 이후의 시’에 속한다. 몰락 이후란 80년대의 사회변혁의 열기에 불을 지폈던 이념의 몰락을 가리킨다. 홍두깨처럼 닥친 90년 이후, ‘몰락 이후의 시’는 적지 않다. 이념의 몰락과 더불어 시의 음조도 한숨과 신음의 악몽 속으로 쫓겨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한숨과 신음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가령, 얼마 전에 이 지면을 통해 다루었던 윤재철의 『생은 아름다울지라도』에는 억제된 피울음이 가득하다. 그 피울음은 몰락의 상황을 어느 다른 무엇으로도 해소하지 못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견디는 정직성으로부터 새어나온다. 시인은 다른 것은 모른다. 다만,..

비극인가 하면 풍자로 읽힌다. 세상 버림의 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의 찬가도 아니다. 정해종의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고려원, 1996)는 그렇게 어정쩡하다. 시로 말할 것 같으면 정리되지 않은 초고들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기묘한 전율이 있다. 그의 우울은 사탕을 씹는 듯이 살똥스럽고, 그의 냉소는 흑염소만큼 쓰다. “LP시대는 물 건너갔다/Liberty, Peace…… 이 케케묵은/먼 훗날 인사동 골목에서나 들어 볼/자유니 평화니 하는 것들, 깨지기 쉬운 것들” 같은 시구는 그런 고통과 독함이 없으면 씌어지기 어려운 시구다. 이 고통과 독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삶의 어느 순간엔 미치도록/죽음의 언저리를 방황하고 싶은 때가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거니와, 희망이 덧없음을 알면서도 희망..

허수경의 시들(『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의 밑바닥엔 `살붙이 정서'라고 이름붙일 만한 감정이 도저한 무게와 속력으로 소용돌이친다. 그 감정은, 이웃으로부터 민족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자신과 피를 나눈 이로 여기며 그들의 불행과 슬픔을 제 몸의 그것들로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데, 한국 시, 특히 근대 이후의 한국 시 독자들에게 광범위한 공감을 받아 온 감정이다. 그 감정은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대 이후 전 민족적 차원에서 고난과 상실과 분열을 경험한 한국인들을 하나로 묶어주어 끝끝내 삶을 지탱하게 한 동력 중의 하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와 `우리 아닌 것' 사이의 심정적인 편가름을 축으로 맹목적인 동류애와 타자에 대한 극단..

이수명의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문학과지성사, 2011)을 읽다가 이전 시집에 비추어 어떤 변모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변모라기보다는 확대로 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는 여전히 그만의 특장인 면모들을 세차게 밀고 나가고 있다. 즉 주체는 희미해지고 동작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 동작들이 기호들로 추상화되고 그 과정에서 동작이 주체로의 변신과 소멸을(왜냐하면, 그의 시에서 주체는 소멸의 운명에 ‘처’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을 꿈꾸는 게 아니다. 운명을 겪고 있는 것이다) 번갈아 되풀이한다는 점, 그런 것들이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그만의 시적 특징들이다. 내가 그의 이번 시에서 어떤 변모, 사실상의 확대를 느낀 것은, 낯선 타자들이 툭 튀어나온 광경들이 ..
Y는 괴리씨가 편집에 관여하던 잡지로 등단한 시인이다. 괴리씨가 무려 70매에 달하는 해설을 곁들여 세상에 내 놓았으나 오랫동안 원고 청탁도 받지 못한 채로 무명 시인으로 살았다. 그렇게 된 까닭으로는 세 가지 정도가 있었다. 우선 그의 시가 알쏭달쏭하기 짝이 없다는 것.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는 거창한 선언으로 시작한 그의 시에는 미래의 모든 시의 씨앗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어쨌든 기존의 어떤 시와도 닮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시인들과 세상의 모든 시 잡지 편집자들의 몰이해를 야기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다음 그의 시에 대해 해설이랍시고 붙은 괴리씨의 글이 또한 난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뭔가를 꼼꼼히 분석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도대체 시종이 분명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