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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수동성의 세계 - 허수경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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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수동성의 세계 - 허수경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비평쟁이 괴리 2024. 6. 14. 02:49

허수경의 시들(『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의 밑바닥엔 `살붙이 정서'라고 이름붙일 만한 감정이 도저한 무게와 속력으로 소용돌이친다. 그 감정은, 이웃으로부터 민족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자신과 피를 나눈 이로 여기며 그들의 불행과 슬픔을 제 몸의 그것들로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데, 한국 시, 특히 근대 이후의 한국 시 독자들에게 광범위한 공감을 받아 온 감정이다. 그 감정은 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대 이후 전 민족적 차원에서 고난과 상실과 분열을 경험한 한국인들을 하나로 묶어주어 끝끝내 삶을 지탱하게 한 동력 중의 하나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와 `우리 아닌 것' 사이의 심정적인 편가름을 축으로 맹목적인 동류애와 타자에 대한 극단적인 배타감을 낳아,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 우리가 맡은 책임의 몫과 우리 아닌 것의 정교한 구조적 체계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소위 베스트셀러 시집들의 많은 경우는 그러한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것을 사적 욕망의 충족과 배설의 차원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상업적 성공의 기회를 잡는다.
 허수경의 시들은 그 살붙이 정서 속에 거의 절대적으로 동의를 보낸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내 가슴 속에 살붙이로만/영판 살붙이로만"(「한 고개 또 한 고개 너머」) 느낀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이용하지도, 그것을 관념적으로 외치지도 않는다. 그는 그것의 구체성 속에 몰입하고, 그의 시를 그 감정의 생생한 물질적 현존으로 만든다. 그 몰입 속에 세가지 순차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하나는 인간의 삶을 자연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며, 둘은 온 몸으로의 받아들임이고, 셋은 역사의 정화이다.
우선, 살붙이 감정이 극단적으로 퍼져 흐르면서 인간들 사이의 유대를 넘어서서 인간의 삶이 자연과 동일화된다. 한국인의 슬픔은 `거름'이 된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광활한 넓이는 한국인의 고난을 받쳐줄 지반이 되고, 그 지반 위에서 사람들 저마다의 슬픔은 단단하게 모여 뭉친다. 보라,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은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탈상」)
그러나, 허수경 시의 인간적 삶은 자연과 동일화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연이 된다. 스스로 자연이 된다는 것은 그 삶이 자연 속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그 자신 타인의 삶들을 무한정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혈육같은 꽃 속으로 들어가/ 얼른 봄이 되고 싶었읍니다/ 꽉 찬 젖을 맘껏 빨리고 싶었읍니다" (「조카 이름 같은 꽃이」)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나듯,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마음은 자연 그 자체가 되어, 타인들을 넉넉한 가슴으로 받아 안는다. 그때, 모든 삶들, 사물들은 살아 움직이며 몸섞는다. 그것들은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이어진다. 그 뒤섞임을 통해서 한국인의 누대(累代)에 걸친 슬픔이 하나의 역사로 재구성되어 그 역사 전체가 오래 오래 되새겨지며 정화된다. 허수경의 시들은 김지하가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말한 세계를 이루어낸다. 그것은 한국인의 슬픔을 안으로 수용하여 오래 달이고 익힌다. 그것의 가장 깊은 의의는 한국인의 역사의 전체적인 수용과 정화이다. 그 수용과 정화를 통해서 시인은 한국사를 새롭게 만들어내려 한다. 그는 "비듬보다 못한/ 날들을/ 등짝에 모진 짐처럼 지고" 사는 한국인의 삶을, 탄식과 비하 그리고 감정적 분노로부터, "한반도는 처녀지가 많아 가슴 깊이/ 밭갈이 한 번 해보지 못한 것 많아/ 현대사 산맥 넘기/ 이렇게 힘겨운 것뿐/ 우린 입성조차 변변치 못한/ 당당한 백성입니다"(「진주초군」)와 같은 새로운 삶에 대한 신뢰와 전망으로 변환시킨다.(『동아일보』1988.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