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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지난 달 끝무렵, 경주에서는 시인 정일근이 화가 김세원과 함께 『경주 남산 시․판화전』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경주 남산은 이름모를 불적들이 들풀처럼 가득 번져있는 산이다. 그 불적들만큼 온갖 전설들이 그 산에 둥지를 트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모임을 가지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는 산, 박혁거세가 그 기슭에서 났고, 또한 헌강왕 때는 산신이 현신하여 나라 멸망을 경고했다는 산이 바로 남산이다. 영화와 패망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아니 탄생으로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내력들이 중중첩첩으로 포개져 있는 이 산을 두고 시인이 노래를 왜 지었겠는가? 내력이란 단순한 역사적 사실들의 진행이기 이전에 마음의 집단적 발화이고 굽이치는 소망의 강줄기인 것. 시인은 남산의 불적들이 저마다 머금..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문학과지성사, 1988) 뒷 표지에 의하면, 윤중호는 서울 사는 촌놈이다. 서울에선 "에그 촌놈" 소리를 들으며, 고향에 가면, 친구들이 말은 안하지만, 그의 몸 구석 어딘가에 빤지름한 도시의 물때가 묻어 있는 것 같아서 어색하다. 그는 이 `재수 없는 삶'이나, 그의 시들이나 꼭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도시 때가 묻어 있다고 어색해 하는 그만큼 그는 촌놈이며, `촌놈'소리를 들으며 버티는 그만큼 서울과 싸우는 서울놈이다. 그 싸움은 서울로 상징되는 지배적 생활 양식이 낳은 갖가지 부정적인 삶의 모습들, 물질 만능, 속도 경쟁, 투기, 조직적 폭력, 자기 보존 본능, 타인에 대한 무관심 등과 그로 인해 촌으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가난과 소외와 죽음, 그리고 설..
백무산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는 노동시의 존재이유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노동자 시인이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그의 시에 등장하는 어휘들은 여전히 그 호칭을 추억하고 있다. “변두리 불구를 추슬러온 퇴출된 노동들”(「예배를 드리러」) 같은 시구가 그것을 또렷이 보여주지만, 그보다는 그가 ‘노동’을 “더 작게 쪼갤 수 없는 목숨의 원소들”이라고 지칭하는 데서 그의 추억의 끈덕짐이 더 진하게 드러난다.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없어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 수밖에 없는 존재”가 ‘프롤레타리아’라는 마르크스의 정의가 매우 강렬한 실존적 의상을 입은 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동자적 정념 혹은 사유의 지속을 시인은 어쩔 수 없이 추억의 범주 안에 넣을 수밖..
백무산이 오랫만에 시를 발표하였다(『창작과비평』, 1996 가을).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본 게 93년 가을(『실천문학』)이었다. 거기서 나는 빙하처럼 가득하고 날카로운 슬픔과 마주쳤었다. 고단하고 병치레를 하는 여인이 있었다고 했다. 그 여인이 어려움에 처한 시인을 돌봐주었었다. 헌데 “안부전화를 했더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한 마디 미안하다는 한 마디는/꼭 해야 할 것만 같았다”(「「슬픔보다 깊은 곳에」」). 그 말은 들어줄 청자를 찾지 못한 채로 울음 가득히 허공을 떠돌았다. 그러나 유령처럼 떠돌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초혼가처럼 퍼지고 퍼져 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시인의 가슴이 무너질 때 독자의 가슴도 에이었다. 그의 슬픔이 피를 흘릴 때 독자는 슬픔이란 얼..
남진우씨의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 2006)는 “내 낡은 모자 속에서 /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모자이야기」)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어서 시인은 말한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우리가 씨의 ‘낡은 모자’를 시의 비유로 읽는다면, 이 시구들은 하나의 시론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언에 의하면 시인은 변신의 시가 아니라 유랑의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변신의 시란 은유로 가득 찬 시를 뜻한다. 그리고 은유로 가득찬 시란 대상과의 합일이 때마다 충만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유랑의 시에도 은유에 대한 꿈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변신의 시에서와는 달리 거기에는 즉각적인 동화가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