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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작품] 농담이우디*우는 얼굴이 웃으며 지나간다 입이 막힌 영상을 보다가 봄이 죽은 소식을 읽는다 너머에서는 총알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는 소식이 자막으로 흐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가게가 붐빈다 급발진한 말들이 꽃보다 붉다 개나리가 만발한 들판에서 잠시 죽어도 될까 귀를 세우고 죽은 봄을 기다린다 오지 않는 얼굴을 미리 읽는다 웃으며 지나가는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농담을 끝내고 싶은데 화약 냄새가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얼룩진 군복의 탈주병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나를 겨냥한 말들이 앞발을 세운다 눈을 가린 나는 바람에 올라탄다 나의 무게를 견디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 대답이 없다 자연처럼 무안하지 않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베일을 벗은 오늘을 아름답다 해야 할까 외출하지 않는..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아홉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위수정의 『우리에게 없는 밤』(문학과지성사, 2004.07)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현실의 흐름에 느슨하게 끌려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감정적인 흥분도 보이고 지적인 호기심도 읽히고, 스스로 이행하는 의지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격렬하지 않고 매우 조용해서 독자가 의식하고 읽을 때에만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각 인물들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행렬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사연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현대인들의 총체적 고립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삶 밑바닥을 관류하는 공통의 느낌..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아홉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강정아의 『책방, 나라 사랑』(강, 2024.07)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은 문체의 투명성이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자.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언니는 그 대학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다. 만나는 모든 남자들이 언니를 보기만 하면 반했다. (p.31) 이 짧은 두 문장은 문장과 의미가 그대로 일치한다. 어떤 암시도, 숨은 의미도, 내포도, 비유도 없다. 다른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 보자. 아이는 소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 맑은 눈과 건강한 볼과 머리카락 향기에 온전히 홀린 마음으로 그네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소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