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오늘의 썰렁담 2021.01.23. 본문

단장

오늘의 썰렁담 2021.01.23.

비평쟁이 괴리 2021. 1. 23. 08:49

✍ 〈이름의 첫번째 글자가 발음되었다. (보르헤스, 죽음과 나침반, 보르헤스 전집 - 2. 픽션들, 황병하역, 민음사, 1994, p.214)

 

감상(感想)을 사유(思惟)라고 적은 글들이 차고도 넘친다. 마음 심()자가 글자마다 붙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 분들에게 사유대신에 생각(生覺)으로 단어를 고쳐보길 권한다. 그러면 지금 뇌에 전달된 정보가 feeling인지 thinking인지 좀 더 명료해질 거라고 확신한다.

 

전설이 된 이상(李箱, 1910~1937) 선생이 그 역시 전설이 된 소설 날개에서 괴리씨에게 물었다. 아니, 괴리씨는 그렇게 물었다고 환청으로 들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괴리씨가 대답했다. “당신 말고는 아주 드물게 보았지요. 한국에 천재가 드물기 때문에 박제가 되는 천재는 더욱 드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그걸 증명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황지우 시인이 김현 선생을 추억하며 쓴 글, 이 세상을 다 읽고 가신 이에서 한 말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직접 들은 에피소드 1 : 대학 재학 시절에(1960~1963)평론으로 데뷔하게 된 당신은 그 글의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주동 선생을 뵈러 갔다. 자칭 대한민국 국보 되신 분의 댁에는 마침 사모님이 안채 문을 잠그고 외출한 뒤여서 국보 되신 분 혼자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제가 김현입니다. 선생님 인사 받으시지요.” “ 아,자네가 김현인가? 그래 ,자네 인사를 받긴 받아야지. 그런데 마누라가 열쇠를 갖고 나가서 … … 할 수 없군. 이리로 오게.” 당신은 국보 되신 분이 이끄는 대로 행랑채 옆에 붙은 창고 같은 데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월동 준비로 연탄이 천장 가까이 싸여 있는 연탄광이었다.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국보 되신 분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당신은 연탄이 쌓인 벽 쪽을 병풍 삼아 정좌하고 있는 국보께 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연탄광에서였을지라도 격식은 격식인지라 간단한 술자리가 펄쳐졌는데 국보께서 이르시기를,“내 자네에게 미리 말하네마는,혹시 자네가 자네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천재는 자네가 아니라 바로 날세” 하더라는 것이었다. (『김현문학전집 16 - 자료집』, 문학과지성사, 2005, 3쇄, 초판: 1993, p.306)

 

위 얘기 중 핵심은 맨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괴리씨는 말을 이어 갔다. “앞 얘기들은 그냥 재미 삼아 읽으시라고 첨가한 겁니다. 여하튼 이 얘기의 핵심은 무엇인가? 무애 선생의 머리 속에는 천재는 오로지 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뜬금없는 얘기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천재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금도 여전히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아기장수설화가 한반도 전 지역에 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기장수 설화가 무슨 얘기입니까? 뛰어난 놈은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한국 서낭당 신의 겁에 질린 초자아적 말씀이지요. 그 아기장수 설화에 강박된 소설이 있습니다. 복거일의 켐프 세네카의 기지촌의 밑바닥 화두가 그거랍니다. 그러니까 한국은 근원적으로천재가 고개를 내밀 기회를 아예 앗아가 버리는 거지요. 누군가는 그래서 한국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온다 하고, 또 누군가는 그래서 한국인은 응용력이 뛰어난 데 비해, 창의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러지요.”

아마도 이상 선생은 스스로 겪은 바도 있는 지라, 고개를 끄덕거렸던 것 같다. 그러나 천재인 선생이 괴리씨의 말에 어떤 모순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 말대로 하면 한국에 천재의 싹들은 많지만 잎을 틔우지도 못하고 사라진다는 얘기잖소. 그러니 박제가 된 천재를 당신이 많이 보지 않았으리오?”

괴리씨가 발끈한다.

아니지요. 박멸과 박제는 다른 겁니다. 박제가 되려면 일단 천재의 광휘를 한 번은 드러내야 하지요. 호랑이를 왜 박제합니까? 갓 태어난 놈을 죽여서 하지는 않지요. 여기서는 박멸당한다니까요.”

이상 선생이 말문이 막혔는지 아니면 뭐라 대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괴리씨는 덧붙였다.

그 대신 천재(淺才)가 되어 버린 박재(薄才)들은 바글바글거립니다. 한국 땅에서요.”

이쯤 되면 순한 이상 선생도 화를 낼 것 같다.

에이, 여보쇼! 나는 박제라고 말했지, ‘박재라고 말하지 않았디오.”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은유라는 거짓말쟁이는 뭣이든 조금만 유사하면 동일시를 해버리지요. 거 발음이 비슷하잖수. 자신을 박제된 천재라고 착각하는 박재들이 아천재! 我天才! 兒淺才!’ 하며 온갖 요란을 떨어대는 세상이올시다. 특별히 그네들이 모여서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시끌법적거리는 장소가 또한 있삼. 그 장소가 요즘 꽤 울림통이 크답니다. 요컨대 목청 높은 놈이 권력을 잡는 세상이지요. 그 천재들이 천재(天災)를 시도때도 없이 불러오지요.”

괴리씨는 스스로의 말발에 도취했다. 눈을 지긋이 감으며, 한국문학을 우주로 쏘아 올리려 했던 전설의 대인 앞에서 풀어 놓는 장광설로부터 퐁퐁 샘 솟는 만족감을 즐긴다 싶었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졸음의 요람을 살살 흔들어 대는 듯했다. 그런데 누군가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게 아닌가? 어리마리한 표정으로 두껍게 가라앉은 눈을 어렴풋이 열어 보니, 이상 선생이 괴리씨를 퍽으나 애처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애처롭다기보다는 딱하다는 게 맞을 듯. 선생은 집게 손가락을 들어 괴리씨의 눈을 찌를 듯이 가차이 겨누며, 짧고 빠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장희!”

 

뭥미?” 선생의 또박한 토막 말씀은 터럭만큼의 느낌도 괴리씨의 눈두덩에 전해지질 않았다. 괴리씨의 입은 호흡을 맞추듯,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짧은 대꾸를 던지고, 눈은 서서히 되감기 모드로 들어갔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쓴 이장희가 생각나셨나? 졸리운 데 더 자라고?”

 

괴리씨는 비몽사몽의 나른함 속으로 기분 좋게 잠겨들었다. 한데, 이번에는 천둥같은 목소리가 울리면서 괴리씨의 고막을 벌겋게 붓게 하는 게 아닌가?

 

“IT’S YOU!”

 

괴리씨가 감기던 눈을, 아픈 귀를 달래는 마음으로, 다시 살포시 열어 보니, 이상 선생의 손가락은 여전히 괴리씨의 아미 간(蛾眉 間)[?! Don’t tell ...!]을 찌르듯 했고, 선생은 다른 한 손과 두 눈으로는 곁에 둔 잡기장을 들춰 보시면서,

 

“C’EST TOI!”

 

이렇게 으르렁대시는 것이다. 그리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시더니, 아무래도 한자(漢字)가 편한 듯,

 

模野猴者

 

라고 허공에 크게 쓰시자마자, 분연히 일어나, 있지도 않은 장삼자락을 떨치듯이 손을 한 번 휘저으시고는 툭 사라져 버리신다.

느닷없는 호통에 잠이 싹 달아난 괴리씨는 벌떨(벌떡이 맞겠으나, 오타가 났다. 왜 오타가 났나 생각해보니, 깨어나는 순간 뭘 지린 듯, 오한에 몸을 떨었던 것이다)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자신이 꿈꾼 줄을 알았다. 등 뒤가 심한 매질을 당한 듯이 아팠다. 등을 만지려고 팔을 뒤로 뻗었으나 재작년 말에 부러져서 나사를 박은 어깨가 통증을 더 했을 뿐, 팔은 더 후회(後廻)하지 못했다. 어정쩡한 포즈로 선생이 사라진 허공을 향해 몸이 붙박힐 찰나에, 눈 앞으로 옛 할머니의 말씀이 비행선에 매달린 큰 리본에 적힌 글자처럼 팔락거리며, 도플러 효과를 일으키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번쩍이는 깜장에 흰 눈 멀세라

 

나는 결코 만인의 찬사를 이끌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터무니 없는 짓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그리고 나는 뚜벅뚜벅 나아가다가, 어디선가 입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게 되리라.” -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 작크 뒤부르Jacques Dubourg에게 보낸 편지, 라뉴Lagnes에서, 195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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