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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한국적 서정성이 시작되다

비평쟁이 괴리 2016. 8. 7. 15:03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어 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있을태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꽂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있을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1) (1934.4)


이 시 앞에서 해석은 거듭 붓방망이질을 한다. 이상하게도 여러 뜻으로 읽힌다. 좋은 시의 기본 자질이 ‘모호성’에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교과서에 실린 얘기다.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제대로 전달한 교사가, 아니 평론가가 드물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게 오늘의 문학교육의 현실이다. 여하튼 모호하다는 것은 의미가 중층적이거나 복합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런 의미에서 모호한 게 아니라, ‘알쏭달쏭’한 것 같다. “엉뚱한 사람에게 애매하게도 누명을 씌었다”라는 ‘애매’에 더 가까운 듯하다. 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으며 괜한 용어 시비에 휘말리는 게 껄끄럽다.

나는 처음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의 표현으로 읽었고, 소년 시절에 국어 시간에서 배운 대로 ‘모란’을 조선 독립 혹은 광복의 시적 형상화라고 보았다. 그런데 나는 금세 그런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 번째 행에서 화자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 날 /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라고 말하고 있다. 모란은 이미 피었던 것이다. 이미 피었다가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 날 / 떠러져 누은 꽂닢마져 시드러버”렸다.

그러니까 이 시는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자하는 염원의 표현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도 상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상실은 자연적 과정 속에서 언제나 돌아왔다가 떠나가는 것이다. 되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아도 모란은 핀다. 그렇다면 도대체 첫 연의 저 간절한 마음은 무엇인가? 때가 되면 피고야 말 텐데 왜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는가?

시에 제시된 단서는 다음과 같다: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피었을 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핀 모란에 부응해서 내 기운은 뻗쳐 올랐다. 그런데 내 기운이 어떤 보람을 얻기 전에 모란은 지고 말았다. 그 보람이 무엇인지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 모란이 피어 있을 때만 뻗쳐 오를 수 있다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다음 번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건, 내가 온전히 내 보람을 뻗쳐 오를 수 있게 될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인가? 그게 바로 화자가 두 번째 행에서 “나의 봄”이라고 지칭했던 것인가?

이렇게 읽으면 모란이 피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내 보람을 가장 완벽히 구현하기 위해 기운을 낼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 된다. 그게 설혹 실패로 끝날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매일 모란이 피기를, 즉 그럴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리라. 이건 꽤 그럴 듯한 해석이다. 그 보람의 실체가 무언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여기에서 기다림의 대상은 어떤 상태가 아니다. 동작이다. 내가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꾸기 위해 행할 움직임이다. 즉 내가 바라는 것은 핀 모란이 아니다. ‘모란이 피다’라는 동사이다.

그러나 이 해석도 완벽하질 않다. 왜냐하면 마지막 행이 실패를 운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찰란한슬픔의 봄”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보람 있게 행할 일의 장려함과 동시에 그 장렬한 실패를 예정한다.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결국 실패할 거라면 그 모습이 아무리 찬란하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보람이 없는 걸?

하지만 특유의 시적 결단으로 해석하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내 움직임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법적 좌절이라고. 만일 정말 보람이 성취된다면 나는 기쁨에 잠길 것이되, 그 대가로 움직일 명분도 사라진다. 시는 이제 날개를 접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한자 인간의 삶에 적절치 못하다. 인간의 삶은 늘 한계의 노출과 그 극복의 영원한 도정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인간의 움직임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 지속을 위해서 성취는 때마다 유보되어야 한다. 그 유보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동작의 좌절이다. 한편으로 성취를 위한 동작을 극대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실패를 운명화한다. 그럼으로써 움직임이 항구화된다. 이 항구성에의 요구가 독자의 심금을 파고들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 시가 단순한 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의미의 다층성이라는 뜻에서 모호성으로 가득찬 시다. 무엇보다도 최종적 도달점으로 지시되었으며 따라서 가장 구체적인 형상으로 상상된 ‘모란’은 실은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이 그 모호성의 진정한 의미이다. 모란이 필 때, 나는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 가 아니라 나는 완성을 향한 운동을 개시한다.

이러한 해석은 이 시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된 소이를 알려준다. 시간의 풍화를 견뎌낼만한 힘이 이 시의 모호성 속에 저장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네 가지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첫째, 조국의 광복을 꿈꾸는 시가 아니라는 것. 이 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 놓인 ‘인간의 태도’에 관한 시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교과서적 해석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케 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의미 심장한 문제들이 있다. 이런 시가 왜, 어떻게 씌어질 수 있었던가, 라는 문제이다. 이 의문은 독자로 하여금 한국 근대시의 시초를 돌아보게 한다. 즉 김소월과 만해의 연장선상에서 김영랑을 파악하는 문제이다. 이것이 두 번째 생각의 단초이다.

언뜻 보아서 김영랑의 이 슬픔의 시는 김소월의 시와 많이 닮아 있다. 주제상으로 그렇다. 김소월의 대부분의 시가 그러하듯이 이 시도 ‘그리움’의 시다.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김소월, 「님의 노래」)


에 적시되어 있는 ‘그리움’말이다. 그러나 어딘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소월은 그리움을 말할 때 그리워하는 주체의 움직임을 빠뜨리지 않는다. 가령 방금 따온 시에서도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이 ‘의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절창이 태어난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 후일」)


떠나간 연인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는 이 시의 매력은 “잊었노라”는 말이 떠난 님을 교묘히 자극한다는 데에 있다. 말의 내용은 연인의 떠남을 스스로 접수하지만 말의 형식은 떠난 연인을 꼬집고 있다. 이로써 시의 화자는 이중적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한다. 한편으로는 연인이 떠난 일을 자신이 주도하는 사건으로 만들고(이것이 Fort-Da 놀이를 통해 프로이트의 외손자가 했던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 떠난 연인으로 하여금 떠난 일을 반성케 하는 존재로서 연인에게 개입한다(이는 프로이트의 후손이 결국 직면해야 했던 Fort-Da의 최종적 결손 사태를  ‘반복강박’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제 3의 길이다.) 이 개입을 통해 화자는 연인에게 떠난 일을 원점으로 돌릴 것을 쏘삭인다. 이는 김소월 식 화자의 특유의 태도이다. 우리는 「진달래꽃」의 화자에게서 같은 태도를 발견하고, 그 시에 대한 종래의 해석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나타난 결정적 변화는 이 주체의 운동궤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체는 더 이상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기다리는’ 존재로서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존재에게 다가오는 것은 오로지 대상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그 대상은 ‘모란’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에서 오직 움직이는 것은 모란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 이미 모란은 피었고 그리고 졌다. 그리고 화자는 운다.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그리고 화자가 인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다리는 일 뿐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테요 찰란한 슬픔의 봄을.”

우리는 김영랑의 시의 거의 대부분에서 이런 대상의 전적인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싶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2))


앞에 김소월을 읽으면서 ‘쏘삭이는’ 존재가 ‘나’임을 보았었다. 김영랑의 시에서는 정확히 “햇발”이 “소색이”고 있다. 대상은 단순히 운동 주체인 것만이 아니다. 그는 돌담에까지 내려오고 풀아래까지 비추어 들어 화자의 외적 환경을 장악하고 있다. 그 안에 갇힌 채로 ‘나’는 겨우 “하늘을 우러르고싶다”는 소망만을 피력한다.


어덕에 바로누어

아슬한 푸른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이졌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어덕에 바로 누어」)


김소월에게 있어서 “잊었노라”는 진술이 대상을 자극하기 위한 전략적 진술이라면 김영랑에게 “이졌읍네”는 순수한 자기 진술이다. 하늘이 “너무 아슬”해서 대상과 만날 길이 막막해서 잊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사태가 주체를 완전한 존재 망실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시가 씌어질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실은 오히려 거꾸로이다. 이 사태는 주체에게 무언가를 보장해준다.


뉘 눈결에 쏘이었오

왼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담안에 복숭아꽂이 붉고

박게 봄은 벌서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두리 단두리 로다

뷘 골ㅅ작도 부끄러워

홀란스런 노래로 힌구름 피여올리나

그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뉘 눈결에 쏘이었오」)


이숭원은 “재앙스럽소”를 “짓궂은 아이”의 태도로 풀이하고 있다(p.25.) 그 풀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상이 주체를 간질이는 양태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앞에서 대상만이 운동하고 주체는 보기만 한다는 것을 충분히 말했다. 보는 주체는 그러나 운동력을 아예 상실한 존재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저 대상의 ‘찬란함’ 혹은 ‘홀란스러움’이 주체에게 끊임없는 운동의 시작을 자극한다. 그 덕분에 주체는 운동을 개시하고자 하는 몸짓을 한 후 운동을 이어나가지 못한 채로 다시 되돌아와 첫 운동을 다시 시작한다. 마치 맨 가장자리에 흠이 생겨 끊임없이 첫 곡조를 되풀이하는 LP판과 같다. 그 흠 덕분에, 즉 운동 가능성의 부재 때문에 운동의 몸짓은 언제나 ‘신생’의 동작을 되풀이한다.

그것이 김영랑 시의 매력이다. 앞에서 “모란이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한 진술의 정확한 뜻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모란을 잃어버린 비극은 ‘비극의 향락’으로 바뀐다. 비극은 기쁨이 탄생할 조건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 영원한 비극은 기쁨을 영원히 탄생 속에서 재생되게끔 한다. 만일 비극이 그친다면 기쁨은 얼마 후 지리해질 것이다. 그러니 비극이여, 영원하라! 저 “수집어진 하늘빛”은 바로 그 향락적 비극을 수일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 ‘수줍음’을 태어나게 한 내 “눈결”의 음험한 죄악을!

나는 여기에서 한국적 서정시가 태어났다고 본다. 앞으로 이어서 보겠지만 미당 서정주의 시가 한국적 서정시의 완성형이라면(내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미당 이후 한국의 서정시의 ‘장(場)’은 미당을 시늉하는 언어-동작들로 번잡해졌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분명 김영랑에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서정시는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그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아니 한국 근대시의 최초의 보기를 제공한 그들의 시로부터 어떤 ‘편차’가 발생하였고 그로부터 김영랑적인 것이 우세해졌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진술일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점에 대해서 묻기 전에 김영랑의 시가 만해의 시로부터는 어떤 편차를 발생시켰는가를 마저 보기로 하자.

김영랑이 김소월로부터 ‘그리움’을 물려 받았다면, 만해로부터는 그의 비극적 세계관을 물려 받았다. ‘비극적 세계관vision tragique’이란 단순히 좌절과 절망의 세계관이 아니다. 그것은 김우창이 골드만Lucien Goldmann3)으로부터 그 용어를 빌려 와 만해 시를 해명하는 데 썼듯이4), 의미의 무와 충만의 동시성을 가리킨다. 그것을 예전에는 역설이라고 말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에서 시작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로 이어지는 시구들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을 일상의 차원으로 옮기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억지가 된다고 나는 이미 말했었다. 그 점을 들어 나는 이 세계관을 “질 수 없는 자의 신비주의”라고도 명명하기도 했다5).

그러나 만해는 그가 감당할 신비주의를 주체를 대상화함으로써 혹은 대상을 주체화함으로써 해결해냈다. 다시 말해, 그가 기리는 님을 그가 그리는 기루는 민중과 호환시켰던 것이다. 그가 불쌍히 여긴 자들과 그가 그리워 한 님 사이에 원환이 형성되어 순환하는 구조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 점을 나는 이 연재의 앞 부분에서 분석하였다. 그것은 행동의 원리를 끝까지 끌고 나간 데서 비롯되었다. 김영랑에게는 당연히 그런 순환구조가 없다. 그의 시에는 행동과 관조가 엄격히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의 신비주의가 ‘억지’로 치닫는 걸 차단하였다. 떠난 님을 쫒아가 패악을 부리지는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는 신비를 관조 속에 내장하였다. 그것이 기다림의 향락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물어보자. 어떻게 이런 태도가 가능했던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 강점기 하에서 조선인의 행동 능력이 망실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독립선언서」에 나와 있듯이 ‘독립국’과 ‘자주민’을 당당히 요구하는 근대적 지식은 가득 찼다. 그러나 3.1운동은 처참히 좌절하였다.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에서의 행동의 완벽한 불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 때문에 한반도 밖으로의 상상적 도피, 실제적 망명이 이루어졌다. 상상적 도피는 ‘조선심’, ‘조선적인 것’의 발명으로 나타났다. 실제적 망명은 임시정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피도 망명도 할 수 없었다. 김영랑의 시적 태도는 바로 근대에 대해 개안한 사람들이 근대적인 것을 성취할 가능성을 잃어버렸을 때 그 성취에 대한 갈망을 유일한 낙으로 삼음으로써 배태되는 태도이다. 그것은 정확히 ‘정치적 준비론’에 조응한다. 김영랑이 출범시킨 한국적 서정시 안에 향락이 있었다면, 정치적 준비론에도 당연히 향락이 흐르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그걸 견뎌 냈겠는가? 그러니까 나는 이 ‘향락’이라는 어휘를 결코 ‘비난’의 뜻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 그건 생존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직시해야만 하는 엄혹한 사실은 정치적 준비론이 지배적인 것이 된 한반도의 미래는 1945년에 준비가 전혀 안된 채로 해방을 맞이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준비론 쪽에서는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한반도의 지배적 사조가 아니었다고. 그렇다면 사회적 준비론이라고 바꿔 말해보자. 그건 분명 지배적인 분위기이자 태도였다. 친일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친일의 상당 부분은 개인적 영달의 측면도 있었겠지만, 공적으로는 이광수의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는 변명이 가리키듯, 어떤 미래를 위한 준비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 의미 때문에 그 행위에 죄의식보다 합리화가 강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사회적 준비론의 결과가 준비 없이 해방을 맞이한 사태라는 점은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비판이나 비난을 위해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의 앞선 세대가 끌고 갔던 역사였다. 그들은 그것을 단순히 겪은 게 아니라 스스로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손쉬운 가치판단을 할 수는 없다. 그걸 뒷 세대는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 그들의 몫은 얼마간의 함량을 가지는 것일까? 나는 그에 대해 아직 명료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이 행동으로부터 관조의 분리. 개입으로부터 기다림으로의 전환을 무의식적 차원에서 가장 선연하게 느낀 사람은 이상이라는 점을 부기해두자. 엉뚱한 얘기 같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바로 「오감도 시 제1호」가 그 보기이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 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 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러케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뚫닌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6)


이 시에서 “무서운 아해”를 ‘무시무시한 아해’로 해석하는 사례도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 시에서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할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의 차이는 무서움의 정신적 자리의 차이이다. ‘무서운 아해’는 무서움을 오로지 체감하는 아해인 반면, ‘무서워하는 아해’는 그 체감을 의식하는 아해라는 것이다. 김소월·한용운으로부터 김영랑으로의 이행은 ‘무서워하는 아해’로부터 ‘무서운 아해’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김영랑으로부터 서정주로 이어지는 흐름이 ‘무서운 아해’들의 질주라면, 김영랑-서정주로부터 이탈하는 흐름, 가령 박두진이라든가, 훗날의 황동규의 시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길에서는 ‘무서워하는 아해’들이 질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김영랑의 시점, 즉 1930년대의 시점에서 우리가 일단 확인하는 것은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즉 느끼는 존재와 생각하는 존재가, 체감하는 존재와 의식하는 존재가 갈라졌다는 사실이다. (『현대시』2016년5월,6월)


1)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숭원, 『영랑을 만나다 - 김영랑 시 전편 해설』, 태학사, 2009, 175쪽.

2) 영랑시의 모든 인용은, 이숭원, 『영랑을 만나다 - 김영랑 시 전편 해설』에서 한다.

3) 『숨은 신Le dieu caché』, Paris: Gallimard, 1959; 송기형·정과리 역, 도서출판 인동, 1981.

4)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궁핍한 시대의 시인 - 현대문학과 사회에 관한 에세이』, 민음사, 1977

5)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마다 위기는 달랐다」, 『현대문학의 연구』, 제 51호, 한국문학연구학회, 2013.

6) 『이상문학전집 - 1-시』, 김주현 주해, 소명출판, 2005, 82~83쪽. 이 시는 1934년7월24일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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