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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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문학의 잠재적 무한을 위하여

비평쟁이 괴리 2023. 10. 24. 10:03

대학생 문학은 잠재 문학이고 동시에 문학의 잠재태입니다. 문학의 수면 위로 부상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잠재 문학이며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예측불가능의 양태로 품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의 잠재태입니다. 또한 대학생 문학은 아직 문학의 유통 회로 속에 끼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에도 잠재적입니다. 무릇 부재하는 것은 현존하는 모든 것의 미래형입니다.
이 잠재 문학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학번을 거쳐가며 항구적으로 되풀이되는 아마추어리즘에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개의 경향이 길항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 하나는 생의 리듬과 언어의 리듬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 잠재 문학은 저의 언어를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언어는 시방 여러분의 생의 거죽들, 생의 모공들, 생의 뇌하수체에서 쉼 없이 배란되고 있는 중입니다. 잠재 문학은 호흡하듯이 씌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은, 그 또한, 유보된 생입니다. 아직 여러분은 사회생산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가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조직의 과실도, 조직의 쓴맛도 보지 않고 있습니다. 문학뿐 아니라 생도 잠재 생이고 생의 잠재태입니다. 이 유보에 의해서 대학생의 생은 사회적 삶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의 표면에 밀착한 대학생 문학은 엉뚱하고 글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발적입니다. 여러분의 눈으로는 호흡하듯이 쓴 글이 사회의 눈으로는 생의 리듬을 끊는 단절과 폭주로 어지러운 난문입니다. 쓸 때의 감각으로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읽을 때의 감각으로는 가장 어색합니다.
여러분이 가져 온 원고를 일별해 보니, 이 두 개의 경향이 혼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군요. 자신의 생을 바수고 이겨 빚어낸 언어의 조각이 기성품의 세련됨을 바짝 위협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세공의 수준을 가늠하며 흔감해집니다. 속으로는 다음에 만나면 부러 엄격한 얼굴을 짓고 잘 쓰기보다 달리 쓰기에 진력할 것을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아무도 가지 않은 문학의 신천지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최초의 표현, 누구도 구사해보지 못한 어법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독하고 고독한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현대문학의 가장 의미심장한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근대사회 이래 발명된 신화라 할지라도 그 신화를 철저히, 처절히 꿰뚫고 지나간 사람들의 생의 궤적에는 아주 소중한 까닭이 있습니다. 물론 속생각도 있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하늘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걸 말해줘야겠다고 말입니다.
아무려나 유쾌합니다. 보고 있을수록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여러분과 정이 잔뜩 들었나 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심심하면 부르지요. 불러서 놀리지요. 나는 놀리는데 여러분은 긴장하지요. 글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가슴에 주름살 생기지요(나는 웃느라고 얼굴에 주름살 생깁니다). 그래서 요즘 여러분 얼굴 보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주름살은 젊음에 치명적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가슴속의 주름살은 보이지 않습니다. 걱정 말아요. 그뿐인가요. 내면의 주름은 창조와 영감의 저장고입니다(왜 뇌에 주름이 잔뜩 잡혀 있을까요). 주름의 겹이 많아질수록 문학의 잠재량도 무한을 향해 갑니다. 주름은 생의 순간성에 지속과 영원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류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요? 나보기가 두려워 숨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게 아니라 저마다 자신만의 주름을 생성하느라 분주했겠지요. 그래서 나온 게 오늘의 문집이 아닙니까? 주름의 한 면이 접혔다 열리다 다시 접힌 게 이 글 모음 아닙니까? (글을 내지 않은 사람은 아직 주름이 완성되지 않아서겠지요.) 다시 여러분의 원고를 뒤적이니 그게 뚜렷합니다. 보기에 썩 좋습니다.
󰏔 2002. 12, 청춘만세(연세대학교 문학특기자모임 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