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한국문학의 가능성(?)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하나

한국문학의 가능성(?)

비평쟁이 괴리 2023. 10. 1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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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은 기대를 동반한다. 그것은 앞날에 대한 예측이 아니다. 그것을 말할 때 사람들은 이미 희망을 말하고 있다. 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때는 그러니 행복한 때이다. 그의 사전에 가능성이란 단어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그의 삶은 이미 죽음이다. 미래로 열려 있지 않은 삶은 운동하지 않는 삶이고, 운동하지 않는 삶은 정지된 삶이며 정지된 삶은 죽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에 관해 말할 지금, 더욱이 한국 문학에 대해 말할 지금은 가능성을 발설하기 전에 오래 주저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곳에서 한국문학의 가능성이 있는가?
어느 지금, 어느 이곳인가? 이 물음은 당연한 대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시․공간적 축의 변화, 즉 삶의 좌표의 이동이 물음의 밑바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깊은 강을 건너 왔음을 느낀다. 그 이동의 자리는 분명, 지난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가파른 단애로 분리된 자리이다.
이 절벽 이편에서 한국문학의 생명은 실질적으로 위협당하고 있다. 그것을 위협하는 것들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한국 사회와 한국 문화의 체질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뒤바꾸고 있는 것들이다. 우선, 90년대 들어, 문화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소비 문화와 멀티미디어, 문화 산업이라는 세 영역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 문화의 침공은 엄격히 보아 80년대 초 제 5공화국 때부터 시작되었는데(프로야구의 창설이 상징적인 보기이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재래의 문화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90년 이후이다. 소비 문화(향유를 위주로 하는 문화)는 문학과 정반대의 방향이다. 문학은 소비 현상을 반추케 하는 문화, 즉 사유를 생산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멀티미디어가 압도하면서 문학은 위축당할 수밖에 없다. 멀티미디어가 인간의 꿈을 직접적으로 실현해 보여주는데, 문학은 언제나 간접적으로만 혹은 암시적으로만 그것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향유가 중심이 되고 향유의 직접성이 다투어 욕망되면, 당연히 문화 산업이 팽창한다. 생산적 문화는 문화의 생산성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경제적 부가가치가 다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면, 문학, 즉 경제의 방향에 제동을 걸고 그것의 윤리적 의미를 따지는 일체의 활동은 외면되거나 파묻힌다.
다음, 문화 생산자와 수용자, 혹은 지식인과 대중을 가르는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비칠 수 있는데, 그것은 문화 생산의 민주화를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 산업의 회로에 말려 들어간 민주화는 오히려 대중들이 민주 시민으로 자랄 가능성을 봉쇄한다. 생각해 보라. 문화 산업이 부추기는 대중의 각종의 자발적 취미 생활들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자질구레하고 사소하기 짝이 없으며, 사회의 근본적 존재 의미에 대해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들이다. 대중들은 날마다 한 사람의 주체가 되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기획하고 시도하고 성취한다. 그런데, 그 기획․시도가 궁극적으로 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본 적은 없다. 그것이 슬로테어딕크가 “자발적 중독”이라고 부른 오늘날 대중의 모습이다.
세 번째로, 생각의 전달 매체로서 문자보다 기능적으로 우월한 것이 나타났다. 최소 정보 단위로서의 비트(Bit)가 그것이다. 비트는 무게가 없으며, 따라서 생산․유통량과 속도에서 문자의 그것들을 훨씬 능가한다. 비트는 문자와 달리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문자에 잔뜩 묻게 마련인 각종의 이데올로기의 때가 끼지 않는다. 또한 비트는 자유 합성과 변조가 가능해서 문자의 이차 분할 체계가 갖는 표현 가능성은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비트는, 그의 속도에 의해 전 세계 상에서 ‘실시간’대의 대량의 정보 교환을 가능케 했으며, 자유 합성과 변조의 능력에 의해, 가상 현실의 창조를 가능케 했고, 그 중성성에 의해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민주주의(양방향성)를 잠재적으로 수립하였다. 적어도 그것이 정보화 사회 예찬자들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세계화가 있다. 오늘날 세계의 소통 언어는 빠르게 영어로 수렴되고 있다. 비트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여전히 생존할 수 있는 이유로는 최소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류의 매체 습관이다. 아직 비트는 언어를 일상적으로 대체할 만큼 보편화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언어는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데 비해, 비트는 다른 것으로 변형됨으로써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트는 즉각적으로 쓰일 수 없다. 즉각적으로 쓰이는 것은 비트에 의해 생성된 표현물들(음향․영상 등)이다. 따라서 비트는 그것이 가진 무한한 조합과 생산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쓰이기가 힘들다. 그러나 비트의 등장은 세계를 단일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이로부터 재래적 매체의 단일화 경향 역시 가속된다. 오늘날 영어가 세계어로 발돋음한 현상은 이러한 사정에서 비롯된다. 세계 내의 한 지방어에 불과한 한국어는 세계어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 못하며, 당연히 한국어를 매체로 한 한국 문학의 전망도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2
문학은 소비 문화, 멀티미디어 문화에 비해 수량적 빈곤을 감수할 수밖에 없으며, 그 빈곤을 채우기 위해 문화 산업의 회로에 편입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또한 문학은 ‘자발적 중독’의 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그것은 근대 이후 문학의 본성이 삶의 근본성에 대한 질문으로 정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문학은 대중의 부상 혹은 반란이라는 현대적 현상에 적대하게 된다. 문학은 비트에 비해 생산력이 현저히 뒤쳐지며 후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문학은 매체에 대한 심각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제 한국 작가들도 영어로 글을 써야 할 것인가?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영어를 취하면 세계화의 뒤꽁무니를 간신히 붙잡을 수 있겠지만 그 대신 한국인의 몸과 언어에 새겨져 있는 역사적 경험을 포기해야 한다. 혹은 한국인 고유의 역사적 경험과 그로부터 획득된 세계 인식과 예술적 표현 형식이 새로운 언어에 다시 새겨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기상도 안에서 문학은, 더욱이나 한국문학은, 시계 제로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살 수밖에 없음을 지난 수 년 동안 되풀이해 말했다.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학은 종치고 싶어도 종을 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타종봉을 쥐고 있는 자는 문학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다. 권력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권력자는 문학을 버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왜냐고? 다시 되풀이하자면, 새 문명의 생명의 원천이 낡은 문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탈개인성과 항구적인 미끄러짐을 특징으로 하는 새 문명이 개인성의 신화와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고 있음을 여러 번 지적한 바 있다. 그 지적들에 보다 근본적인 대답 하나를 추가하기로 하자. 앞에서 ‘비트는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결핍이자 낡은 문화를 이용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조건이다. 비트는 비트로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정체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헛것이다. 그리고 헛것은 실한 것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 음향, 동영상, 특수 효과가 실한 것들인가? 아니다. 그것들은 실한 것처럼 보이는 헛것의 확대일 뿐이다. 왜 그러한가? 그것이 비트들의 조합의 결과로 생산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과 문화는 실재와 상상 사이의 날카로운 단절 위에서 출발한다. 그 단절이 갖는 의미는 실재에 대한 관심이 현대 문화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된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 다만, 창조된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의 실재성의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재성의 보장이 없는 문화 생산물은 동시에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지속성이란 그것이 생산물로부터 자생체로 존재전이를 할 때 생겨난다. 생산만 되는 것들은, 그것이 현재 확대 재생산의 과정 속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결코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 생산 부품 하나 망가지면, 그것은 대번에 호흡이 멎는다. 때문에, 그것은 문화 수용자들에게 문화 향유를 통한 자기 정체성의 확인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문화 향유의 첫 번째 원칙은 감정 이입이다. 향수자는 대상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과정을 통해 미적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 대상이 헛것이라니? 그것은 주체 자신도 헛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니, 현대 문화에도 실재성의 원칙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실감이다. 즉 존재를 느낌으로 대체함으로써 실재의 환상을 부여한다. 그러나 실감이 실존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 아무리 흉내내도 슈퍼맨은 맨이 아닌 것이다.
실감은 편안하고 동시에 불안하다. “어떤 위험도 없이” 원하는 것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한데, 그러나 그 향유가 단지 느낌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불안하다. 이 불안감은 멀티미디어로는, 하물며, 컴퓨터 게임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는 바깥에 구조 신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가 저의 해방을 위하여 헛간에 처박았던 낡은 문화에게 말이다. 실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리얼리즘’과는 얘기가 다르다. 그것이 정말 실재에 닿아 있는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낡은 문화는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 즉 그에 대한 맹종이자 그에 대한 탐구이고, 그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이자 그에 대한 끝나지 않는 의혹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라 불리든, “양심이라고도 불리고, 주체성․의지․물 자체․절대 정신․가치․이데아․로고스․길 따위”로 불리는 그것에 대한 “끝없는 짝사랑”(최인훈)에 낡은 문화는 운명적으로 처해져 있는 것이다. 최인훈이 이 “제 3의 공간의 틈, 좁은 해진 자리”를 “보는 눈”이라고 말한 것은 실로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왜냐하면 그 실재의 형이상학에서 실재란 주체의 눈이 몸을 버리고 홀로 튀어나가 저 편에 자리잡은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인간의 행위란 이 보는 눈과 내적 공간상과 외적 공간상의 트리오다. 이 보는 눈의 건너편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 절대로, 이 눈은 하나의 탄력점이다. 나를 여기까지 몰아 넣은 이 사고는 이 점에 와서 강하게 튕겨진다. 삶으로. 그것은 뚫고 나감을 허락하지 않는 존재의 마지막 문이다. 다그쳐 온 힘이 강할수록 튕겨지는 힘도 강하다. 그것은 반작용이 적용되는 탄력점이다.”2지나가는 길에 덧붙이자면, 나는 지금 20년 전 시도했던 최인훈 해석을 교정하고 있다. 나는 그때 똑같은 진술을 인용했더랬는데, 작가가 현실로서 묘사한 것을 가치에 대한 요구로 재단하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주체의 몸이 아니라 주체의 시선이 실재를 향해 튕겨져 나갔다는 것, 차라리 그것이 실재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주체의 행위는 저 바깥의 눈까지 갔다가 되튕겨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은 주체가 실재에 정말 가 닿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관계가 없는 얘기다. 이것은 주체가 자기의 실재를 찾기 위해서 어떻게 운동하면서 뿌리의 혹은 본질의 혹은 자기 정체성의 심연을 파느냐의 얘기다. 또한 따라서 이것은 리얼리즘이든 낭만주의든 고전주의든 상징주의이든 모두 똑같다. 이른바 근대성은 이 하위 범주들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이 실재에 대한 신앙이야말로 새로운 문화가 결국 회귀할 수밖에 없는 자리이다. 이로 인해 현대 문명과 문화의 존재 양식은 ‘불순성’으로 특징지워진다. 그것은 낡은 문화를, 혹은 낡은 신화를 부착함으로써만 탄생하고 생장하고 발전한다. 퍼스널 컴퓨터는 가장 대표적인 표지이다. 퍼스널 컴퓨터야말로 현대 문명과 낡은 개인성의 신화가 절묘하게 결합한 장소이다. 컴퓨터뿐일까? 우리는, 왜 터미네이터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볼 수 있다. 그리고 ‘T-1000’(로버트 패트릭)보다 ‘Terminator aka 101’(아놀드 슈워즈네거)이 더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점점 더욱 인간을 닮아가는 것이며, 차라리 인간 닮아가기가 그의 본래 역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3
그러니 문학은 저의 소멸의 동굴 한복판에서 회생의 실낱을 거머쥔다. 문학이야말로 낡은 문화의 원자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이 쥔 질긴 실낱은 동시에 가늘기 짝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문학이 살아남는다고 해서 그저 안도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 실낱이 가늘다는 것은 그것이 휘둘릴 운명에 시달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문명이 개인성의 신화를 이용하는 것은 자신을 더욱 팽창시키기 위해서이지 타협 혹은 회귀를 위해서가 아니다. 문학의 장소는 알리바이의 장소이다. 그것이 가늘다는 것은 또한 실낱이 새어들어온 구멍을 문학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불행히도 동굴의 문은 닫혔고, 그 문의 열쇠는 “열려라 실낱”이 아니다. 그러니 문학이 저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 살면서 저의 사라짐, 소멸을 문명의 곳곳에 새겨 그것을 세상의 법칙으로 만드는 길 외에는 없다. 세상 속으로 스며들기, 스며들기 위해서 저를 녹이기, 그렇긴 하되 저의 본성을 버리지 않고서 스며들기, 스며들어 저의 본성의 용액으로 세상을 녹이기, 질주와 확산으로 아득한 이 현대 문명의 세계에 벌레와 파충류들이 우글거리는 습기찬 고뇌의 웅덩이들을 파기 혹은 결코 건널 수 없는 아득한 살수(薩水)를 문명의 욕망과 문명 사이에 설치하기. 문명의 욕망은 곧 문학이므로(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성의 신화이고, 그 개인성의 담지체는 문학이니까), 그것은 문학이 문명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대신 문명과 동서하면서 불화의 칼날을 사이에 그어 놓고 있는 행위에 다름 아니니, 트리스탄과 이졸데 사이에 놓인 교접을 부인하는 칼날과도 같은 불상용(不相容)의 칼날을 세워놓는 것, 혹은 ‘내부로의 탈출’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내부에서의/로의 탈출이 개시될 때 우리는 아라공처럼 이렇게 물을 수 있다:“뱀장어냐 잉어냐/양어장의 법을 결정하는 것은”(「해방」, 『신-斷腸』). 물론 양어장의 법을 결정하는 것은 양어장 주인이지 물고기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해방은 양어장 주인을 물고기로 끌어내릴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인이 물고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 주인은 저의 의지와 무관하게 물고기의 상대역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잉어는 혹은 뱀장어는 이 순간을 노린다.
이 비유는 문학의 내부에서의/로의 탈출은 정밀한 측지와 능력의 점검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문학의 실지 회복에 대한 꿈이거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도피거나 모두 낭만적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저 개인 신화의 시대, 즉 근대에도, 문학은 마냥 세상의 운행에 동참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문학은 문자 문화와 함께 나란히 근대의 핵심을 통과해 왔으나, 그것은 협력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부정(프랑크푸르트 학파적인 의미에서의)의 방식으로이다. 그 부정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진실 내용을 삶에 개입시키기(아도르노). 그것은 ‘천부 인권’과 ‘사회 계약론’에 근거한, 즉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신화에 근거한 근대 사회가 실질적으로 개인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데 대한 항의의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상상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에 대립시키기. 이 방향을 통해서 문학은, 근대를 넘어서게 된다. 원래 상상의 세계는 진짜 현실에 대한 추구로 생산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 진짜 현실은 다른 현실로 대체되었는데, 왜냐하면, 현실 바깥에 진짜 현실을 세우자니 이 현실의 삶의 근본 형식, 즉 개인주의의 세계를 넘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개인들이 하나로 융합하는 세계, 혹은 이질성들의 끝없는 혼효의 세계가 문학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집단 창작으로부터 사드의 폭력적 혼합에 이르는 그 광대한 범위 전체에서, 온갖 방향으로 탐구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방식을 반성과 상상이라는 두 용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성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반성에, 다른 현실을 추구하는 것을 상상에 도식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반성과 상상은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은 곧바로 전혀 다른 현실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던 것이다. 반성은 말의 바른 의미에서의 질문, 즉 이중적인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는 질문으로서 근대의 본질에 대한 추구이자 동시에 의혹이 되는 것이다.
현대 문화는 저 반성과 상상의 활동 속에서 반성을 배제하고 상상을 극대화한다. 가능성을 무한대로 이끌어올리는 것 혹은 가능성을 현실 너머로 초월시키는 것. 그것이 비트, 멀티미디어, 특수 영상 효과가 노리는 것들이다. 그것을 폭발시키는 과정 속에서 현대 문화는 반성의 기능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반성이란 바로 현실 쪽으로 화살표를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 반성은 문학만의 고유한 본령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현대 문화에서 문학이 수행할 제 1의 역할이 반성적 기능이라는 것을 뜻한다. 모든 활동을, 모든 문화적 표현물들을 ‘진실 내용’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기 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안 된다. 이 활동은 필경 현대 문화와 문학을 적대하게 만드는데 그러나 적대는 결코 문학의 살 길이 아니다. 활용이냐 스밈이냐만이 선택 사항들이다. 활용의 운명을 스밈과 전복의 운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러니, 현대 문화가 빼앗아간 ‘상상’의 기능을 문학은 되찾아와야 한다. 다만, 그 상상은 반성과 하나로 맞물린 상상, 그 본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복원한 상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복원이 옛 형태의 되풀이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진정한 복원은 조건의 변화를 고려한 복원, 즉 스스로 변신되는 복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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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冒頭)에서 제기한 문제들 중 나는 한 가지 대답을 빠뜨렸다. 한국문학은 이제 영어로 씌어져야 할 것인가? 대답이 되지 않았더라도 여러분은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실로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할 때가 혹은 자발적으로 그러할 때가 올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을 한국어로 쓰기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고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에게는 한국어가 모국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자기 문자를 상실한 종족은 수없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부지기수다. 모국어를 가지지 못하는 종족이라고 해서 문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한국문학의 장에서 한국어는 반성의 기능이 극대화된 자리, 들뢰즈의 용어를 빌자면, ‘탈영토성’의 표지이자 가혹한 싸움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21세기의 새로운 세대들은 언어들의 갈등과 공존의 문제라는 과제를 추가로 떠안게 될 것이다.
󰏔 1999 여름, 내일을 여는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