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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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들에게 보내는 서한

비평쟁이 괴리 2023. 10. 26. 20:00

지상에 유배된 아폴론은 악기를 놓고 목동의 막대기를 듭니다. 순수하고 맑은 외관은 노래를 부를 때와 다름없이 퍽 어울립니다. 하지만 가수의 욕망과 목동의 의무는 어긋나기만 합니다. 장식의 희열을 노동하는 의지로 변화시켜나가는 동안 아폴론의 타고난 아름다움은 이제 법칙화된 미의 형식으로 뒤바뀝니다.
순수한 기쁨으로 글을 한 줄 한 줄 써나가던 시절이 여러분에게 있었지요. 지금 여러분의 시간은 전진과 수련의 시간입니다. 세상의 정면을 마주보고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 뛰어가는 때입니다. 글쓰기의 기쁨은 인식의 노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아름답게 세공하는 시간은 지나고 사회의 구조와 억눌린 자의 고통과 사랑의 난해함을 배우게 됩니다. 인식하는 정신은 세상 전체를 자신의 몸으로 채울 꿈을 꿉니다. 노래의 꿈은 이제 수확의 꿈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신의 밭을 넓혀나가면서 여러분은 노래하던 자신이 거북살스럽습니다. 세상의 고통에 꽃의 아름다움이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합니다. 옛날의 철학자가 말했듯이, 문학은 배고픈 거지 하나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느끼지도, 하물며 겪지도 못한, 여러분은 대체의 방정식만을 압니다. 그래서 노래하던 몸의 율동을 인식하는 정신의 운동으로 바꾸고자 하지만, 꽃을 그리던 손이 세상의 지도를 그리기는 참 어렵습니다. 둘 다 조형적 작업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니 둘 다 조형적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외관을 구성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 작업은 ‘기술’입니다. 기술은 언제나 국소적입니다. 목수는 석수의 기술을 모르고 조산원과 호상의 일은 아주 다릅니다.
로르카가 21세에 쓴 시 「샘」은 아폴론의 고뇌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샘들이 노래하는 걸 듣습니다. 그는 샘들이 높은 포플라 나무 꼭대기에 모인 저녁 별들에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그 대화에 참여하고 싶지만, 그는 오직 바깥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때,

“나무가 되어라!”
 멀리서 어떤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그러자 별들의 격류가
티 한 점 없는 하늘을 구른다.

나는 백년 된 포플라 나무 속에 상감되었다.
불안스레 구슬프게
향수와 그늘의 아폴론에게서
겁에 질려 달아나는 남성의 다프네.

화자는 아폴론 대신에 다프네가 되기를 자청함으로써 샘들과 별들 사이의 긴 통신 속에 참여합니다. 대상이 주체가 됨으로써, 그리는 자가 그려지는 것이 됨으로써, 그는 외관을 구성하는 자의 근본적인 소외에서 벗어납니다. 또한 그리는 자가 그려지는 것 속에 스며듦으로써 그는 저 긴 통신을 생의 박동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나무에 스며들어 샘들과 별들 사이의 통화선으로 살면 살수록 그는, 나무의 운명, 즉 지상에 묶인 자의 운명에 절망합니다. 그 절망의 끝에 다시 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종달새가 되어라” 치명적인 간극 속에서
어떤 길잃은 목소리가 말한다.
그러자 불붙은 천체의 격류가
밤의 심장으로부터 솟구친다.

몸의 교체가 아니라 심장의 파열만이, 다시 말해 주체의 위치변환이 아니라 주체의 찢김만이 존재의 근본적인 전환을 가능케 합니다. 아폴론의 시인 로르카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니체라면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전환은 주체를 영원히 파편들로 살게끔 함니다. 살점들, 넝마들, 쪼가리들.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디오니소스적 존재는 아폴론적인 것을 파괴하며 동시에 갈구합니다. 파괴하면 스스로 찢김의 운명에 처하고 갈구하면 소외의 운명에 처합니다.
타고난 아폴론들인 여러분은 아직 그 모험의 문턱에 다가가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바깥과의 동일화, 혹은 세상의 흡입에 분주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여러분은 근본적인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정신들이 감행했던 것처럼 그 동안 자신이 이루고 축적했던 모든 것을 찢어발기라는 내면의 독촉과 마주칠 것입니다. 외면할 수도 있는 직면입니다. 다만 그것은 올 따름입니다. 낯선 냄새, 문득 스치는 바람, 언뜻 달의 표면을 가르는 빛. 아주 먼 곳으로부터 여러분은 이미 “몸이 아픕니다.” 
󰏔 2003, 글林(연세대학교 문학특기자모임 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