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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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공방/문신공방 하나

오늘의 소설(1990년대) 설문

비평쟁이 괴리 2023. 10. 17. 13:50

오늘의 소설에 대한 세 가지 답[1]

 

1. 대중문화의 기법형식 수용문제

질문최근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장편소설들은 추리소설의 기법이나, SF소설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대중소설의 기법이나 대중문화의 형식들이 본격소설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현상일텐데요. 이러한 소설 형식의 변모가 지닌 새로운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비평가의 입장에서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50년대의 실험극단들이 좋은 참조가 것이다. 센느강 좌안에 옹기종기 모여서 코메디 프랑세즈 정통 고전 연극과는 다른 연극을 만들고 부수기를 되풀이한 연극인들은 보드빌, 인형극, 신문 가십, 저자거리의 저속어들에서 재료를 취하여 그들만의 특이한 연극 언어와 기법을 제작해내었고, 마침내 그들의 연극을 새로운 고전으로 확립시키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신연극의 세계는 그들이 재료를 빌어 곳들의 세계와는 하나도 닮은 데가 없었다. 왜냐면, 도저히 해독불가능한 무의미한 동작과 언어들이 무대에 난무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샌프란시스코의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관객으로 공연되었을 반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험악한 죄수들은 연극이 끝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가 전율하고 있었다.[2]

다른 예도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만큼 유용한 교훈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교훈은 가지이다. 우선, 형식과 기법의 혁신은 예술적인 것의 경계에서 배제되었던 것들에서 솟아난다는 것이 하나라면, 혁신은, 그러나, 전혀 새로운 재구성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 둘이며, 혁신은 독자층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셋이다.

오늘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대중문화와의 접촉도 기본적으로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선은 세상이 달라졌다. 물론 아주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이 시대의 문제를 여전히, 혹은 더욱 심각하게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니 때문에 실은, 문제의 틀은 달라졌다. 주목해야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자리에서 문제틀의 변모라는 것의 정치경제학적 현실태가 무엇인가를 논의할 여유는 없을 것이며,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다. 문학에 대해서만은 말이 있을 것이다.

문학은 이상 사회 혹은 역사와 직접 대면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적대자(혹은 경쟁자) 문화가 되었다. 문화적인 것의 팽대가 오늘의 새로운 현상이며, 그것의 문화적 의미는, 어느 순간 문화의 빅뱅이 있었고( 빅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대 초반까지, 다시 말해 프로야구의 탄생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문화적 기호들이 삶의 공간에 포화되었다는 것이다. 문화는 삶을 되새기거나 추동하는 상징물의 단계를 벗어나 자체가 되어 버렸다. 대중문학은 문화의 그러한 성장에 힘입어 문학의 상부 지대로 그대로 약진하였다. 대중소설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감상시 그리고 비문학 쪽에서의 영화와 함께, 문화 팽창의 공간에서 특이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소비문화와 반성적 문학 사이를 매개하는 통로가 것이다. 대중소설은 소비 문화의 흥미를 제공해주면서 동시에 문학에 대한 재래의 환상(보편적 진실의 환기) 충족시켜주는 실속 있는 장르로 부상한 것이다.

문화적인 것의 지배라는 경향은 가속적이어서, 아마도, 문화 전반이 예전에 문학이 독점하고 있던 지위를 차지하게 즈음이면, 대중 소설의 지대는 오늘과도 같은 신바람을 느끼지는 못하게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문학적인 것이 여전히 문화 공간 내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문화 수용 방식이 아직은 문학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과 더불어 문화적 소비 능력은 괄목할 만하게 확대되었고 그것은 문학의 소비 능력도 함께 확장시켰다. 다른 한편 다른 문화들의 향유도 굉장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특히 오디오와 영상. 이것은 이제 오디오 비쥬얼 통합 문화 발전할 것이다), 소비자 일반의 처리 능력은 문학에 대한 능력에 못미친다. 여전히 오락과 편리 이상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고 있으며, 주체적인 향유, 다시 말해 문화를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아직 문학이 담당하고 있다. 와중에서, 소비 능력의 확대와 문학 지배의 지속 사이에서 독서 시장의 변모가 있다. 소연령층 독자의 확대와 고학력 주부층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들은 물론 문화 일반의 소비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문화 소비자로서의 등장에 비하면, 문학 독자로서의 등장은 아주 미미한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 수용자(재생산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학 독자로서의 등장이 중요한 문화사회학적 의미를 띠고 있다. 문학은 문화 일반과 비교할 때는 갈수록 예전의 영광을 박탈당하고 있으나, 문학 자체만으로서만 보면, 자신의 입지를 넓힌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감상시의 서점 만연과 -역사 소설 증후군이 나타날 조건이 배태된 것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오늘까지 점증된(소연령층 소비자의 등장은 좀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현상은,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공백기의 현상이다. 문학의 입장에서 정말 중요한 문화적 현상은 이제 문학을 이상 대문자 문화로서 간주하지 않는 세대들이 미래를 담당하게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문학을 여전히 문화들의 아비로 추억하긴 하겠지만, 아비는 이상 권위도 능력도 갖지 못할 것이다. 통신망 속의 참여자들처럼 애비자식이 모두 동등한 성원으로서 서로를 상대하는 시대가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여전히 아비이긴 것이며, 그것이 그를 지속적으로 비교적 특이한 지위에 놓이게 것이다. 아무도 후레 자식 소리는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문자의 통합, 다시 말해 문자의 수학기호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말이다.

오늘의 소설이 대중 소설에서 기법을 차용한다면, 그것은 소설에게는 대중 소설이 위와 같은 문화적 변화의 계기판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의식 있는 소설가들은 사회와 역사에서 소재를 취하는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그의 문학적 경쟁자인 대중문학으로부터, 혹은 그의 현실적 경쟁자인 문화 일반으로부터 자료를 취할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을 없는 것이다. 들어가되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소설가들은 세계를 뒤집어엎거나 갈가리 찢거나 어찌하거나 소설만이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이뤄내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소설적 실천들을 벌써 가지고 있다. 가령,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는 공상과학소설에서, 이명행의 『황색새의 발톱』은 정치 추리 소설에서, 이석범의 『권두수 선생의 낙법』은 청소년 명랑 소설에서, 채영주의 『시간 속의 도적』은 「쾌걸 조로」 류의 영화(만화) 부랑아 소설들에서 주요 구도와 기법을 빌어 왔지만, 다시 말해 이번에는 거꾸로 그들이 대중문화의 자식됨을 자청했지만 어느 작품도 아비와는 생판 얼굴이다. 『역사 속의 나그네』는 차라리 『로빈슨 크루소』,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과 계열적 관계에 놓여 있으며, 『황색 새의 발톱』은 추리 소설적 결말을 와해시킴으로써 독자들의 의식을 곤두선 긴장으로부터 무거운 고뇌로 이동시키고, 『권두수 선생의 낙법』은 심각한 사회 문제의 안에 명랑소설적 구도를 내삽시킴으로써 아주 씁쓸한 해학을 창출해내고 있으며, 『시간 속의 도적』은 폭력과 원한에 대한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무겁고 폭폭하고 집요한 것을 어둠으로부터 일상의 공개적 차원으로 끌어낸 최초의 소설이 되었다. 그것은 깔끄럽지만 맛있게 씹어내야 일용할 양식이지, 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작가는, 우리의 곳곳에 스며든 문화들을 빌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패러디와 혼성모방

질문최근 패러디와 혼성모방에 대한 다기한 논의들이 제기되면서 이러한 문학 기법들이 지닌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폐해에 대하여 논의가 조금씩 진척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창작자 자신의 목소리는 별로 들려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의 전언과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만의 고유한 세계를 지녀야 한다”라는 전통적인 화두 사이에서 어떤 균형 감각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심도 깊게 논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생님께서는 패러디나 혼성모방의 바람직한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시대를 지배해 2개의 신화가 있다. 창조의 신화와 반영의 신화. 작가가 신적 부권의 대리인으로 여겨질 반영의 신화가 세계 위에 드리워지고, 개인이 세계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을 창조의 신화가 흑사병처럼 번진다. 전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후자는 상대적으로 짧은 연혁을 가진 개념이지만, 모두 오늘날까지 두꺼운 시간줄기를 이루면서 생장하고 있다.

그에 비해, 모방은 아주 최근의 개념이다. 모방이라는 용어 자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상용화된 용어지만, 모방(mimesis) 함부르거가 세밀하게 분석해 보여주었듯이 그대로의 모방(imitatio)이라기보다는 창조(poiesis) 속품은 개념이었다. 실제로 예술의 역사에서 모든 모방 주의와 형상은 창조와 반영의 접합지대에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실재에 대한 신앙과 실행자의 자유의지 사이의 진동 그것이 모방이라는 팡파르를 밤하늘에 울려퍼지게 것이다.

오늘날 유행하게 혼성모방은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과 자유의지의 형이상학을 포기하고 있다는 데에 특이성 현대성이 있다. 혼성 모방은 모방들만의 호모 섹슈얼리티이다. 어느 독창성 진리 기원에도 의지하지 않고 모방으로만 글쓰기, 모방의 중심과 방향을 무너뜨림으로써 모방의 동작에서 ~에 대한이라는 현상학적 의미망을 박탈하기. 그것은 진리가 무너진 시대의 몸의 혼란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것 또한 시대의 반영에 불과한 것인가? 불행하게도 반사의 진원지는 옛날처럼 찬란히 빛을 발하거나 내부에서 용솟음치는 것이 아니라, 허무만을 가져다준다. 그곳은 폐허며 혼돈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사 행위자를 없게 만든다. 혼성모방의 종말도 어떤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을 번지게 할지 모른다. 사막에 버려진 자는 신기루를 찾아 헤매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는 율도국을 꿈꾼다. 마찬가지로 혼성 모방에 포박당한 자는, 자신의 의도에 관계없이, 그의 궁극적 의지처를, 목표를, 알리바이를 몸으로 갈망하지 않을 없게 될지도 모른다. 반영의 우주가 신의 형이상학에, 창조의 우주가 인간의 형이상학에 귀속되듯이, 모방의 우주라고 기계의 형이상학(스타 워즈 형이상학) 만들어내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로부터 혼성모방의 지도에는 3개의 길이, 차라리 종류의 생명공학이 생겨난다. 상품의 (공학) 놀이의 (공학) 패러디의 (공학) 그것이다. 길은 혼성 모방의 불임성 낡은 신화의 유용한 도구로 전환시킨다. 리얼리티와 창조의 강박관념을 떨쳐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무기로 리얼리티와 창조의 환상을 촉진시키고, 그게 신기하다는 때문에 그리고 그게 시대의 실상이라는 환상에 뒷받침되어 대단한 소비욕구를 일으킨다. 그것은 광고로부터 대중소설들에 이르기까기 폭넓게 퍼져 있다. 번째 길은 모방의 행위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정말로 실재거나 자유의지거나 인간 행위의 모든 뒷무대를 제거하는 길이다. 언어의 동작을 순수 시니피앙들의 놀이로 만들기, 몇몇 뛰어난 사유인들은 그것을 글로,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랬는데, 희한하게도 그들이 남긴 것은 그들만의 것이 되었다. 다만, 결코 계승될 없는 방식으로, 다만 영원한 전범으로서만 존재하는 방식으로. 번째 길은 혼성 모방의 절차를 그대로 뒤집어엎는 방식으로 따르는 길이다. 혼성 모방에 대한 가장 뜨거운 사랑으로 혼성 모방을 완벽하게 붕괴시키기. 『가르강튀아』와 『돈키호테』가 기사도 로망에 대해 했던 , 마르크스가 헤겔의 표현 방식을 가지고 짓까불었던(kokettieren)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상품의 길은 의미 치환의 길이며, 놀이의 길은 의미 배제의 길이고 패러디의 길은 의미 전복의 길이다. 공학은 재생산의 공학이고, 번째 공학은 해체구축의 공학이며, 번째 공학은 창조의 공학이다. 하나는 오늘날 우리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고, 둘은 외로운 사유인들 몇몇이 보여주었을 뿐이며, 셋은 이제 생겨나고 있는데 실천들만이 지시해줄 있는 전망을 아직은 예측할 없다.

 

3. 신세대 문학()

질문최근 신세대 문화에 관한 논의, 혹은 신세대 문학에 관한 논의가 문화계의 가장 중심적인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몇몇 젊은 작가와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신세대 문학과 신세대 문학론에 대한 선생님의 솔직한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질문이 90 초반부터 젊은 비평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동세대 옹호론 유신 세대와의 차별론을 염두에 두고 제기된 것이라면, 그것을 신세대 문학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움직임은 세대론적 전략을 밑에 깔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419 정신으로의 복귀라는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비평가들의 글들이 한결같이 인문학적 상상력으로의 회귀를 말해 왔으며,[3]그들의 분석과 해석에는 이른바 신세대적인 글쓰기 별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60년대 비평가들의 전집 간행을 두고 80년대의 이념 비평적 시각과 태도를 다시 60년대적 시각으로 되돌리는, 혹은 90년대적 태도로 잡아당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장하고, 90년대 비평가의 문학적 접근을 단선적이며 가파르고 굳어 있던 80년대의 비평적 자세를, 풀고 헤치고 반죽하여, 새로운 시대의 정황에 들어맞을 부드러움의 비평으로 바꾸어 되찾으려는 욕망의 움직임에 의한 것일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그들이 인간의 얼굴을 문학으로 돌아오고 [4]진단한 419세대 비평가의 호응도 그에 대한 증거로 삼을 있을 것이다.

만약, 질문이 표절 논의 둘러싼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의 일련의 자기 옹호적 발언들과 언론의 호기심을 염두에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문화적 정황 변모와 관련하여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작가들의 발언과 소개보다는(왜냐면, 작가들은 작품으로 충분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분석이 다양하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분석은 아직 크게 눈에 띄는 것이 없으며,[5] 문학적 의미망의 분석으로는 김지영의 「어떤 아이러니-허구의 정서, 허구의 방식[6]돋보인다. 공시된 신세대 아닌 젊은 세대 일반의 문학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는, 이남호의 「偏母膝下에서의 시쓰기」 후반부,[7]장석주의 『세기말의 글쓰기』(청하, 1993) 3부와 5, 그리고 『문학과 사회』 93 겨울호 특집, 젊은 문학은 어떻게 오고 있는가 실린, 김병익황종연정과리의 글들이 도움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세대론을 말하기보다는 세상의 변모와 관련하여 새로운 세대의 글쓰기를 말하는 것이 생산적이라는 판단 때문에, 질문은 항목 1 항목 2 진술로 대답이 대신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1994, 오늘의 소설



1 이 글은 『오늘의 소설』(현암사, 1994. 1)에서 준비한 설문에 대한 답변으로 씌어진 것이다. 원래 편집자는 네 개의 항목에 대해 질문하였고 필자 역시 네 항목에 대해 답변했으나, 이 책에서는, 지금 돌이켜 보아 부적절하다고 여겨진 영화 문제를 제외한 세 개의 답변만을 싣는다.

2 마틴 에슬린, 『부조리 연극』, 불역본, Editions Buchet / Chastel, 1977, p.16.

3 이에 대해서는 졸고, 「다시, 문학성을 논한다?(『문학과 사회』, 1991 겨울)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4 김병익, 90년대 젊은 비평의 새로운 양상」, 『문학과 사회』, 1993 겨울, pp.1331, 1333.

5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발표되었다는 이윤택의 글을 미처 읽지 못했다. 그 글이 우리의 눈을 열어 줄지도 모르겠다.

6 『문학과 사회』, 1993 여름.

7 이남호 평론집, 『文學의 僞足』, 민음사, 1990, pp.106~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