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문학정신과 작가의 과제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하나

문학정신과 작가의 과제

비평쟁이 괴리 2023. 10. 9. 10:31

분명 오늘의 문학은 중심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이 삶이거나 문화거나 문학은 그의 터전에서 실긋 비켜 서 있다. “문학[은]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는 문구는 문학의 황금기를 연 70년대 어느 시인 총서의 표제문이다. 오늘의 문학은 그런 휘장을 두르기를 주저한다. 언제부터인가, 다른 말들이 그것을 밀쳐내기 시작했다. 이념의 몰락, 과녁의 실종, 영상 매체의 도전, 문화 산업 속의 상품화… 그리고 마침내는 문학의 죽음이라는 유령까지도 출몰하였다. 문학을 죽일 수 있는 말들이란 말들은 다 상자 밖으로 튀어나와 낄낄거리게 되었다.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이 문학 정신이라면 이제 문학의 어느 곳에 정신이 깃들 처소가 있는가? 황폐한 정신, 정신나간 정신이 있을 뿐인가? 아니면 어떤 고스트버스터가 나타나서 저 괴상망칙한 말들을 다시 쓸어 담고 문학의 제 정신을 똑바로 세울 것인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유령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문학 자신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령이란 몸 없는 혼백을 뜻하는 것이니, 문학은 실로 저의 몸을, 다시 말해 물적 토대를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성적 문자 문화’를 뜻하는 ‘문학’이라는 용어가 세상에 출현한 것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문자가 건축을 살해하고 문화의 중심 매체로 등장한 시대, 즉 근대 이후의 일이다. 이제는 문자가 디지털 부호에게 헤게모니를 내 줄 차례가 되었다. 문자(민족어)와는 달리 어떤 역사적 뿌리도 생의 찌꺼기도 단숨에 휘발시키는 그것에게 말이다.
그러나, 유령이란 어쨌든 세상 속의 현존재다. 유령은 혼백을 몸처럼 살면서 안 다니는 데가 없다. 실로 문학은 죽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자세히 보면 문학은 양적으로 계속 팽창해 왔다는 것이다. 광고며 영화며 통신이며 신종 문화 매체들은 그 화려한 진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에게서 영감을 구하고, 문학에 조언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실증적 정신, 이 완고한 정신이 짐짓 모른 체하는 것은 문학이 더 이상 옛날의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문학은 그의 태생적 유산을 지키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상이 그것을 버려야 할 유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삶의 표상들에 내재적 반성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본성이라면, 그 본성은 여전히 모든 공간에서, 문학의 내용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과 향유의 전 위상 내에서 절대 순도의 혈액으로 흐른다. 문학 내부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모든 바깥에도 문학은 있다. 광고 안에는 시적인 것이, 통신망 내에는 문학 광장이, 영화 속에는 문학성이, 그렇게 문학은 도처에 범람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라, 이 도저한 반성의 언어들, 세상에 대한 부정적 상상력들, 다른 삶을 향한 꿈들, 문학이 촉발하는 온갖 탈-현실의 행위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아주 현실적인 그것이다. 세상 버림의 노래는 ‘절망하였노라’는 외침으로 세상을 유혹한다. 가장 부정적인 언어는 문학과 현실 사이에 가장 긍정적인 화해 지대를 마련한다. 일간지 하단과 방송 막간의 광고에서 뿐만이 아니라 문학 작품이 들려주는 신기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타고 흐르는 박진하고 아련한 리듬을 통해서도, 그 이야기와 리듬의 끝없는 복제와 변이를 통해서도 그렇게 한다. 그 모든 것들의 조합 속에서 문학은 여전히 저의 본질을 현시하면서 세상 속에 신비롭게 살아 움직인다.
그러니까 문학의 본성은 우리의 소중한 유산으로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함은 자존심 때문에, 가까스로, 그러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아주 도전적으로 기세등등하게 그렇게 한다. 예전의 문학이 세상을 신비화하는 유혹에 끊임없이 이끌려 왔다면, 이제 문학은 그 자체로서 신비이다. 고뇌의 상징, 반성의 상징, 추억의 상징으로서 그것은 신비가 된다. 그 태도 속에서 권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태도 속에서 경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태도를 통해 고출력 파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니 문학은 여전히 중심에 서 있다. 다만, 문학은 그 스스로 그곳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을 중심에 서게 하는 것, 즉 문학의 주체는 더 이상 문학 그 자신도, 저자도, 독자도 아니다. 그것은 문화 사업가, 문화 장사치들도 아니다. 그것은 문화 산업의 순환 구조 그 자체이다. 저자와 독자와 출판과 서적과 서점과 제작과 광고와 학문과 평론과 기타 등등이 저도 모르는 채로 한꺼번에 저마다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는 그 구조 자체이다. 바로 그것이 문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길들이는 무서운, 아주 호의적인, 고스트버스터이다.
문학이 중심으로부터 비켜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희한한 문학의 새로운 존재 방식에 대한 사유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문학의 존재태의 균열이다. 모든 사유는 내재된 균열이 잉태시키는 것이다. 그 균열의 어느 지점에 작가가 있다면, 작가에게 어떤 과제가 주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과제라기보다 차라리 운명과의 싸움이다. 그는 더 이상 문학의 실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옛날로 돌아가자는 왕정 복고를 주도할 수도 없으며, 그가 균열인 한은 오늘의 존재 양태 속에 행복하게 안주할 수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에게 주어진 이 특이한 존재 양식을 전복적인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주어진 삶을 수락하는 내력 그 자체를 붕괴의 과정으로 만드는 것 말이다. 그것이 작가 각자에게서 어떻게 실행될지는 이 글의 몫이 아니라 작가의 몫이다. 다만, 우리는 내재적 반성이라는 문학의 옛 본성이 어느새 슬며시 다시 한번 문학인들 앞에 나타났음을 볼 수가 있다. 예전에 바깥 세상을 향해 솟아났던 그것이, 이제는 문학 그 자신을 향해 컴컴한 입을 열고 있는 것이다. 
󰏔 1995. 12. 1, 대학신문, 90년대 문학정신과 작가의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