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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너무 좋아하지 마라

비평쟁이 괴리 2023. 10. 6. 01:54

노벨문학상은 1895년 파리에서 작성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0년 설립된 ‘노벨 재단’이 스웨덴 한림원에 심사를 의뢰하여 1901년 첫 회 수상자를 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노벨 서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시상한다는 관례도 더해져서 외형상의 권위를 잔뜩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사설단체가 주관하는 셀 수 없이 흔한 문학상들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이 곧바로 엄청난 관심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계 문인 전체에 기회가 부여된 막대한 상금 덕택이었다.
심사를 의뢰받은 스웨덴 한림원은 처음부터 “한림원을 일종의 ‘국제 문학 법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으며 심사위원회는 모든 심사과정을 비밀에 부친다는 원칙을 고수했는데, 그것이 상이 발표될 때마다 끊임없이 구설수가 생기는 사태를 막을 수는 없었고 오히려 부추긴 감이 없지 않다(해마다 누구누구들이 후보작에 올랐다는 소문이 시끄럽게 언론에 떠돌곤 하는데 그건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다).
처음 심사위원회는 “고결하고 건강한 이상주의”를 보여준 작가에게 수여하라는 노벨의 유언에 충실하려고 했으며 그것은 노벨문학상의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성향을 가리키는 표지로 비쳤다. 실제로 20세기 전반기의 수상작가들은 유럽권 일색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를 비롯해 카프카․콘래드․무질․헨리 제임스 등 문학의 전위를 이끈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외면되었다. 그래서 1964년 수상자인 사르트르가 ‘부르주아지의 상’이라고 해서 거부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고, 1984년 미국의 비평가 조지 슈타이너는 노벨문학상을 가리켜 “비판적 정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독설을 내뱉기도 하였다.
그러나 창설자의 유언을 편협하게 해석했다는 자성과 함께 심사위원회가 자신들의 취향을 혁신해온 것도 사실이다. 1912년 인도 시인 타고르에게 상이 수여됐고 1960년대 이후에는 비유럽권 작가들에게로 급격하게 다변화되었으니, 이제 노벨문학상은 “문학예술의 파이오니어들”을 기꺼이 주목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가 “유일한 기준은 문학적 가치”라는 심사위원들의 거듭되는 언명을 탄탄히 받쳐주지는 못했다. 비유럽권 작가들에게는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이유로 수상했다는 혐의가, 유럽권 작가들에게는 특정한 심사위원과의 친분이 작용했다는 의심이 여전히 끊이지 않았고, 그런 여파로 1974년의 공동수상자였던 하뤼 마르틴손은 한림원 회원이 수상했다는 비난에 시달리다가 몇 년 후 가위로 할복자살하기도 하였다.
요 근래 노벨문학상에 대한 한국인의 갈증은 부쩍 심해졌다.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 판매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하니, 그 갈증은 분명 문학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이 세계시민으로서의 당연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에서 비롯한 민족주의적 갈증이다. 갈증이 화염이 되어 올해는 온갖 기대와 언짢은 소문들이 난무했다. 그런데 한국 소설가나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아 좋을 일이 뭐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그 말은 한국문학이 세계 안에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쓰게 확인시켜 줄 뿐이다. 순서가 거꾸로 된 게 아닌가? 한국문학이든 한국 작가이든 세계에 알려져야 세계인이 알만한 상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산문화재단’과 ‘번역원’이 번역 사업과 국제 교류에 쏟은 그 지극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학이 세계의 서점에 깔리는 양은 여전히 제 3세계권의 어느 나라보다도 못한 게 솔직한 현실이다. 세계의 독자들은 아직도 한국문학이란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은 시장을 뚫어야 하지 않겠는가? 늘 질시해마지 않는 저 문화선진국들의 톰과 딕과 메리가 한국 소설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가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세계에 알려진 다음에는 노벨문학상을 받는다고 해서 기뻐 날뛸 것까지는 없다. 거액의 상금은 작가의 횡재이지 한국문학의 축복은 아니다. 조이스도 프루스트도 보르헤스도 쿤데라도 안 받은 상이다. 베케트는 받긴 했지만 자신은 연인과 튀니지를 여행하면서 시상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아일랜드 대사가 그를 대신하는 것도 거부”했다. 그는 그의 책을 출판해 준 ‘미뉘’ 출판사의 사장 제롬 렝동을 대신 보내어 “상금과 메달과 수여증서”를 받았고, 상금은 그 후 가난한 친구들을 돕는 데 썼다. 참석 거부의 까닭을 듣자니, “자신을 광고하기가” 싫었다고 한다.
미미하고도 미미한 한국문학의, 모모한 어떤 작가에게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이유로 노벨문학상이 돌아갔을 경우를 생각하면 더욱 난감해진다. 그 작가의 작품은 세계의 유수한 언어들로 번역되어 마침내 일반 독자들의 손끝에까지 가 닿을 것이다. 세계의 독자들은 그 작품을 읽으며 그것이 한국문학의 수준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다른 참조 대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작품이 번역되어야 한국문학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게 될까? 불행하게도 한국은 평등세상이라서 그런 논의를 허용치 않는 곳이다. 
󰏔 2005. 11. 1, 세계일보, 노벨문학상도 賞 중의 하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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