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소수(素數)적 인간 - 임솔아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본문
※ 아래 글은 '제53회 동인문학상' 제3회차 독회에 제출된 독후감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싣는다.
소수(素數)적 인간
임솔아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문학과지성사, 2021.12)의 인물들은 태생적인 비사회적 존재들이다. 그들은 인구의 수열체에 삽입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단독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존재’하려면 사회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근대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는 ‘나눔(divide)’을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구성원 모두가 동의한 ‘법칙’들에 의해 균질화되고 계량화된 다음, 각각의 기능이 배정됨으로써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나눔(分割)이 가능해야, 나눔(share; 共分)도 가능하다.
임솔아 소설의 인물들에겐 이 나눔이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 저 자신과 ‘1’ 외에는 어떤 분할도 불가능한 ‘소수(素數)’와도 같다. 이들은 그런 단독자의 성정을 가지고 사회 내에 출현하기 때문에, 사회의 분할 양식을 납득할 수 없다. 사회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목적과 다양한 방식의 계산식에 수용되지 않는 그가 불가해한 숙제가 된다.
물론 소수적 존재라고 해서 아예 법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하는 법칙은 모든 삶과 모든 사건들과 모든 물상들이 고유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에 근거한 법칙이다. 이 법칙의 원소들은 분할과 재배열을 통해 환원되지 않으며, 따라서 누적만이 가능하다.
정말 그럴까? 소수가 신기한 것은 그것이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예측불가능한 신기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클리드가 증명한 ‘소수의 무한성’, ‘소수와 완전수’의 관계, 오일러의 이차식 ‘n제곱-n+41’(조건: n=1~40), ‘가우스의 계단’, ‘소수 암호’ 등등 무궁무진하다. 소수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역사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봉건 시대에 ‘나누어지지 않는 자(in-divided)’들로서 공동체의 울타리 바깥으로 쫒겨난 사람들은, 시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고, 단독자들의 상호계약을 통한 새로운 나눔의 세계를 열었다. 즉 ‘개인’을 기반으로 한 시민사회를 연 ‘개인들(individuals)’이었다(그러니까 이 소수자들은 스스로 분할자가 되는 방법을 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의 요점은 이렇게 된다. 소수적 인간들의 존재는 단독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단독성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에서 그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 예컨대 필자는 읽지 못했으나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황무지』는 소수를 수수께끼로 한 소설이라 한다(피터 벤틀리, 『숫자, 세상의 문을 여는 코드』, 유세진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8. p.44에서 인용.) 우리는 문학예술에서 그런 단독자들을 많이 보아 왔으며, 그들이 자신들을 휩싼 소외를 무릅쓰고 제작한 불멸의 작품들을 꾸준히 읽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실명 상태의 말년에 자기 작품 속에 빠져서 혼자 웃으며 보냈다. 그의 아내 노라 바내클Nora Barnacle은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잠자리에 누워요, 그러면 옆 방에서 그 사람이 자기 소설에 빠져서[=‘고치면서’의 뜻인 듯 하다 – 재인용자] 쉬지 않고 킬킬대는 거에요. 그래서 나는 방문을 두드리며 말하곤 하죠; 짐, 그만 써요, 아니면 그만 웃든지요.(‘An Interview with Carola Giedion-Welcker and Maria Jolas’, Gordon Bowker, James Joyce: A New Biography, Farrar, Straus and Giroux, 2012[e-pub version]에서 재인용)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그의 작품 『율리시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로서 읽히고 있다. 토리노의 말을 끌어안고 운 니체는 20세기 후반기 이후, 철학의 위대한 입법자 헤겔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철학 자체를 지혜가 아니라 생의 거친 들판으로 인도한 예레미야로서 현존하고 있다.
“문체는 곧 사람이다”라는 말을 뷔퐁(Buffon)이 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얘기다. 그걸 두고 한 정신분석학자는 이렇게 꼬집었다. “문체, 그것은 사람이다. 다만 이때 이 사람이 우리가 말을 건네는 상대라는 것을 덧붙여야, 앞의 정식에 찬동하게 되지 않을까?”(자크 라캉, 『에크리』, 새물결, 2019[원본: 1966], p.14.)
그렇다. 문체의 총화인 문학은 자기 자신을 얘기하는 자리가 아니다. 자신의 펜으로 어두컴컴한 세상의 윤곽을 뜨고, 그걸 그림으로써 자신을 변경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 때에 세상과 나 사이의 계산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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