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음악의 자유’를 향해 가는 도정 - 김태용의 『러브 노이즈』 본문
※ 아래 글은, 제 53회 동인문학상 2022년 1월 독회에서 선정된 후보작에 대한 종이지면용 심사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가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음악의 자유’를 향해 가는 도정
일찍이 18세기의 계몽주의자 달랑베르는 「음악의 자유」라는 글에서, 어떤 나라에서든 존중해야 할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은 “종교와 정부”라고 운을 떼고는, 이어서 프랑스에서는 하나 더 추가할 게 있으니, 그것은 ‘음악’이라고 하였다. 세상을 건설해나가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최고의 화음을 만들기 위해 많은 작곡가들이 악보를 청서(淸書)하던 시절이었다.
이제 세월은 한참 지나 정부는 둔한 깡통이 되었으니 혁신을 요구받고 있고, 종교는 종교들로 분열되어 사방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음악은 나라의 머리에 금관을 올리고자 하는 성가대의 지위에서 내려온다. 왜냐하면 계몽의 정부가 다 감싸 안지 못하는 많은 존재들과 사안들이 온 누리에서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생명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있다. 폐차장에서 시체로 발견된 이민자 여성을 두고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일 가능성이 크다”며 권위자가 한마디로 치워버리는 현실에서 배제되는 운명들이 있다.
김태용의 『러브노이즈』(민음사, 2021.10)는 이렇게 “강물에 노을이 번져 가는 것처럼 외로”운 존재들의 생을 진솔히 들려줄 언어를 찾아 나선 편력의 기록이다. 그 출발 자체가 주인공에게 일어난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한다. 두 소년이 있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 냇가로 수영하러 갔다가 사고가 나서, 물에 빠진 나는 탈영병이 구해줬는데, 살아남은 친구는 집으로 뛰어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잃었다.
주인공에게 각인된 이 트라우마는, 그를 구해준 이가 읊었던 시들에 연결되어, 모든 우연한 생들을 쓰다듬어 밝혀줄 언어에 대한 갈망에 불을 피운다. 그 갈망은 명명의 습관에 사로잡힌 언어의 한계를 넘어 음악으로 간다. 하지만 그 음악은 이제 웅장한 교향악이 아니다. 그것은 하찮은 삶들을 끌어안듯, 소음들을 끌어안아 또 하나의 악절로 만들면서 음악의 둘레를 점점 넓혀 나간다. 진정한 음악은 완성된 음악이 아니라, 매순간 “음악과 같아지는” 음악이다.
지난 작품, 『음악 이전의 책』(문학실험실, 2018)에서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의 ‘micropolyphonie’(번역이 까다롭다. 아주 미세한 음 안에서의 다성을 가리킨다. ‘아음부亞音部다성악’이라고 번역해야하지 않을까?)에 기대어 여러 목소리들을 하나의 웅얼거림 속에 담으려는 희귀한 시도를 했던 그는 이제 음악과 삶이 혈맥처럼 통하는 또 하나의 예술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아직도 예도를 향한 몸짓을 잊지 않은 사람의 행보는 아름답다. 그 예술은 태고의 박물관에 보존된 예술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상승하고 침잠하는 예술이다. 그의 소설도 거듭 진화할 것이다.
'울림의 글 > 소설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수(素數)적 인간 - 임솔아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0) | 2022.03.27 |
---|---|
‘인류 멸망 그 후’의 소설 - 강영숙의 『두고 온 것』 (0) | 2022.03.27 |
‘포켓몬 세대’ 혹은 ‘모태 인권 세대’의 소설 -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0) | 2022.02.17 |
부랑인생의 껍질을 벗고 ... - 서이제의 『0%를 향하여』 (0) | 2022.01.26 |
판타지, 우울의 색 -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 (0) | 2022.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