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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님의 침묵'을 다시 읽는다(1)

비평쟁이 괴리 2015. 4. 25. 08:22

 

I.님의 침묵」을 다시 읽는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 시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중등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이 시를 학습하게 된다. 윤동주의 서시,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더불어 한국인의 3대 필수 시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이 시를 좋아하지 않을 한국인도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망국의 아픔을 겪고 긴 세월동안 피식민지인으로 살아 온 한반도의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이상적인 삶의 자세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 시에 바쳐진 무수한 해석들이 여전히 합의를 못 이룬 데가 많고 또는 이해 불능의 장소들을 적지 않게 남겨 놓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시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있는가? 만일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시가 가장 이상적인 삶의 자세를 제공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는가?

 

□ 님의 조건, 혹은 조건을 사건으로 만드는 시

 

간단한 대답은 시의 전체 의미에 유관하게 개입하는 어떤 부분적인 구절이 그 자세를 함의하고 형상하며 독자에게 권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시를 전체적으로 읽지 못한다. 시의 꿈이 그렇게 통째로 읽히는 것이라 할지라도 혹은 그게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전제라 할지라도, 그것과 실제의 시읽기 사이에는 무한한 계단이 놓여 있다. 아마도 독자는 몸으로는 통째로 읽으면서 머리로는 부분을 통한 느낌의 충격에 의해서 이 시에 단박에 다가갔을 것이다. 그런 충격을 제공할 가장 유력한 부분은 다음 구절이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님이 침묵하는 정황과 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불러야 할 필연성을 한꺼번에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첫 행,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는 님의 침묵의 정황만을 들려주며,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는 님을 보낼 수 없는 까닭만을 밝혀준다.

그러나 이 시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느낌이 꽂힌 독자는 조만간에 이 시구가 의미의 모호한 윤곽만을 제시했을 뿐 의미 자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도대체 이런 태도는 합당한 태도인가?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가령 이별을 통고받은 애인이 집 앞에까지 쫓아 와 이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문자로 보낸다고 해보자. 막무가내의 스토커에게 꼼짝없이 물렸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도 그 말을 한 화자가 님의 귀환이 성사될 때까지 저 말을 되풀이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스토커의 시인가? 그리고 이 시의 마력은 버림 받고 의 위치에 서게 된 사람이 집요한 위협적 태도로 의 위치에 올라가게 된 데서 발생하는 쾌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엉뚱한 해석의 길로 빠져들기보다는, 이 시구가 특별한 조건 하에서만 발성될 수 있는 것임을 영리한 독자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리한 선언마저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조건이 아주 무거울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선 님이 내가 보내지 않을 님이라기보다 차라리 보내면 안 될존재라는 게 수긍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든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서든. 또한 후자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이익이 만의 이익이 되어서는 독자의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공증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가 광장에 걸리자마자 제일 먼저 사람들이 님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니 각종 시험들에서 그 문제가 빈번히 등장했던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님을 조국이나 붓다라고 일방적으로 한정할 수는 없으리라. 이 시의 아름다운 비유적 표현들을건지기 위해서는 님은 그냥 연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며, 그러한 해석이 충분히 이루어진 뒤에 님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 두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이남호의 발언은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연인의 경계를 무한정 넓힐 수도 없다. 앞에서 보았듯, ‘의 곁에 있는 게 모두가 보기에 지극히 타당한 그런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이 님을 어젯밤 클럽에서 부킹으로 만났다가 오늘 아침 해장국 먹고 헤어진 하룻밤의 애인이라고 가정하고 이 시를 읽어보라. 이런 코미디가 없을 것이다. 설혹 그 애인이 너무나 향기롭고 꽃다워서 홀딱빠졌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순간 내 운명이 180바뀌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그런 경우들을 여러 번 목격한 바가 있지만, 그게 흉한 해프닝으로 변질되는 것을 번다히 보았다.

시인 자신이 의 조건을 달았다. 만해는 군말에서 “‘만 님이 아니고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말했다. 거꾸로 읽으면 님이 님이기 위해서는 기룬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 놓고는 기룸의 뜻은 생략한 채로 여기에도 조건을 달았다. 첫째, 기룬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님이라는 것이다. 얼핏 서로 사랑하면 이 되는 듯하다. 그런데 만해는 여기에다 다시 조건을 달았다.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님의 그림자니라.

 

당시의 개화된 식자들의 자유 연애 풍조를 겨냥한 것이 확실한 발언이다. 만해는 앞 문단에서 님을 사랑의 실행자로 포함시킨 후, 이 문단의 첫 대목에서 사랑이 곧 자유임을 스쳐 말하고는 소위 자유 연애는 진짜 자유가 아니라고 신칙하고 있다. 그건 이름 좋은 자유[] 알뜰[] 구속당하는 꼴이다. 자유 연애의 자유는 허울뿐이고, 자유연애꾼이 찾는 님은 진짜 님이 아니라 님의 그림자이다. 정신분석학을 맛 본 사람은 성급히 님의 실재의 항구적인 부재와 님의 시니피앙들(그림자들, 즉 유령들)의 횡행이라는 삶의 현상에 대한 만해의 통찰에 성급히 놀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시인은 정신분석을 거슬러 간다. 그는 현상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실재를 찾아서 간다. 그는 지금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메지를 놓았다. 즉 그는 기루기 때문에 이 시를 쓴다. 이 말은 시인이 이 시를 쓰는 까닭은 님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시는 님을 찾아가는 도정 속에 놓인다. 그런데 만해의 님은 헤매는 어린 양이다. 더 풀어 말하면 만해의 님은 님을 찾지 못하고 님의 그림자들을 쫓아 다니는 님바람 난 것들이다.

여기서 만해는 다시 님과 나의 조건들을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으로서의 님의 조건은 부재하는 님이다. 다음, “기룬 자로서의 님의 조건은 가짜 님을 쫒아 다니는 사람들이다. 셋째, 그런데 에게는 이 방황하는 인간들이 이다. 이 세 조건이 하나로 일치하려면 다시 하나의 조정 조건이 붙어야 한다. ‘기루다는 말은 사랑하다’, ‘진정한 자유로서 사랑하다라는 긍정적 뜻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결여되어 있다’, ‘충족을 해주고 싶어 안타까워하다라는 부정적 뜻을 포함한다. 그래야만 님을 모르는 이들이 님이 된다. 님을 모르는 이들을 기루는 것은 그들이 님을 알게 되기를 갈망하는 일이고, 님을 모르는 이들이 님이라는 것은 님은 미래지향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님은 미래의 방향으로 결여되어 있다. 현재적 관점에서 님은 부정적이지만, 도래할 시점에서 보면 님은 긍정적이다. 그 긍정적인 님은 서로 사랑하되(다시 말해 님을 기루는 자와 님이 상호 순환해야 한다 이것을 가장 맞춤하게 표상하는 이미지는 아마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바지/저고리 접기 놀이이다 ), 자유로서(자유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유의 실행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님은 누구인가에 대해 우리는 그렇게밖에는 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까다로운 정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까다로운 정의 덕분에 일단 님 아닌 것을 찾아낼 수는 있다. 조국은 님인가? 그 조국이 잃어버린 옛날의 조국이라면 그는 님이 아니다(20세기 초엽의 조선인들에게 그런 조국이 있기는 있었는가?.) 변모해야 할 조국이라면 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변모해야만 제대로 변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항시적으로 달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님이 붓다래도, 어제 만난 미인이래도 마찬가지다. 결핍은 충족의 충분 조건이다. 님은 필요 조건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님은 언제나 스스로 달라지도록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이 움직임이 없으면 님의 매혹은 설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님의 침묵에서 님은 내가 뿅 간이일 뿐아니라, 내게 뿅 간이이다. 내가 찾아 헤매는 이일 뿐 아니라 스스로 내 기룸에 호응하여 무언가를 도모하는 이이다. 이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저 님이 이 시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다. 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질문은 님은 누구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님은 어찌 사시는가(어떻게 행동하는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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