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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연재를 시작하며

비평쟁이 괴리 2015. 4. 25. 08:20

시의 숲을 지나서 가지말고 지나다니자

- 연재를 시작하며

 

하염없는 슬픔의 숲 속에서

어느날 나 홀로만의 길을 가고 있었네;

거기서 사랑의 여신을 만났다네

그이는 나를 불러 세우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네.

나 대답하기를, 아주 오래전에

운명이 나를 이 숲에 유배하였으니.

당연히 내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방랑자임을 자청했노라.

- 샤를르 도를레앙Charles d’Orléans 발라드 21

 

문학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독서량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대신 판매는 양극화되었다. 그럴 듯한 작품이 만 부를 팔기가 힘든 상황이 되었는데, 극소수의 베스트셀러는 백만 부를 훌쩍 넘긴다. 그걸 산 독자들이 책을 읽긴 했을까,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유달리 군중 심리가 극성인 한국인들이니, 미디어에서 뜬다고 신호가 울리면 주식청약 하듯 마구 몰려든 건 아닐까? 실제론 군중의 문학 지식의 창고가 갈수록 비워지는 걸 사방에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게 오늘의 형편이다. 청록파의 시인들을 알지 못해서 나를 놀라게 한 학생들은 노래 향수를 들어본 적도 없고 하물며 정지용의 시는 읽어 본적도 없다고 해서 나를 다시 기막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세상 탓을 해서 해결이 되는 일은 없다. 문제는 저하된 독서 상황을 끌어 올리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스마트 폰에서 하루종일 카카오톡과 트위터만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책을 쥐어줄 수 있을까? 절망감이 엄습하지만 이 상황을 개탄하는 것만큼 유독한 것은 없다. 오히려 이 상황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한 복판에서 견뎌야 한다. 그래야만 한 사람이라도 더 독자의 지평에 들어서게 할 수가 있다. 우리가 저 무거운 문학을 심을 곳은 얄팍한 문자문화의 심연이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모든 방책을 구해야만 한다.

불행하게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소박하게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항상 당연하게 그 의미를 받아들여 온 작품들을 다시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발견술적인 자극의 원천으로 그걸 재배치하는 건? 혹은 알려진 바 없는 작품들을, 나의 이기적인 보물들을 풀어 놓는 건 어떤가? 그나마 가진 게 그것밖에 없으므로. 막막하기만 할 때는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기라도 해야 한다. 꼼지락거리되, 그 세기와 맥박을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지금 이곳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낼 실마리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보기로 하자. 다만 결코 멈추는 법이 없기를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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