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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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숲 속으로

쉬는 시간의 잡념

비평쟁이 괴리 2015. 6. 1. 00:30

쉬는 시간의 잡념

 

나는 가능한 한 시를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려고 애썼다. 어쨌든 그 의도가 이 연재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시 한 편을 해설하는 데 이리도 시간과 지면이 많이 들었다.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읽는 이의 생각의 양을 배가시킨다. 읽는 이는 그 양으로도 이미 쉽지 않다. 그러나 제대로 이야기 하려면 이만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쉬운 이야기는 제대로 된 이야기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여기에도 님의 법칙이 작용한다. 쉬운 이야기는 바른 이야기를 기루고 바른 이야기는 쉬운 이야기를 기룬다. 그러나 쉬움의 극과 바름의 극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넓어서 자장이 형성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면 순진한 의도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글은 아주 어린 사람들, 문학이라는 걸 입시의 한 과목으로 대한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글의 애초의 출발점에서 이 글을 부추겼던 이들, 공부는 잘했으나 향수는 들어 본 적도 없던 대학생들, 혹은 님의 침묵을 읽고 비슷한 시를 써보라는 선생님의 주문에 빵집에서 만난  이성 또래를 머리에 그리며님의 수다를 쓸 고등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얘기는 무척 난감할 것이다. 우선 그 양만 보고도 진저리를 칠 것이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라는 델 들어가서 만난 학우들 중 입만 열면 고시얘기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고시에 실패했고 대학에 자리 잡았는데 학생들과 불화하다가 결국 19876월 항쟁 이후 대학 민주화 바람 때 타깃이 되었다. 얼마 후 그는 운명을 달리 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 왜 그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다. 오로지 법만 생각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로 세상의 어처구니 없는 작란에 휘말린 자신의 운명을 개탄했을지 모른다. 너무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가 고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의 운명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법 안에 사람들을 가두는 일에 골몰했을 것이다. 법이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 중엔 나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 훌륭한 법조인들이 생각하시는 걸 보면 십중팔구 내 짐작이 맞을 것이다.

내가 문학을 하는 건 세상살이며 사람놀이의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을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삶 하나하나에서 신생의 의지를 읽으면서, 나 자신 그걸 되살고 싶어서이다. 몰리에르는 그것을 사람의 본성nature’을 밝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 아니 세상 자체의 본성은 결코 일도양단의 방식으로 해명되지도 해결되지도 않는다. 하나의 문장으로 대답될 진리는 없으며 해답을 얻으면 얻을수록 질문의 양은 더 늘어가기만 하는 게 사는 꼴이다. 인류가 역사를 만든 만큼 미래의 가능성은 더욱 열린다. 세상의 이치는 해득될 수 없고 물리는 트이지 않는다. 그게 진화의 일반 법칙을 벗어난 지적 생명의 운명이다.

나는 나 스스로가 그런 세상의 본성을 정직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의 시비를 단번에 판가름할 수도 없고 세상살이의 목표가 오로지 하나일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최소한 그런 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며 문학을 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 형편은 그런 나의 소망을 좀처럼 들어주지 않는다(이 말을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판단으로 읽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오히려 세상은 아주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여하튼,) 나의 기룬 이들은 나를 기루지 않는다. 이런 자각보다 더 쓸쓸한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이해를 포함해 세상살이의 이해에는 다단계의 층이 있으며 그 층들 사이에는 아주 복잡한 영향과 반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이해의 계단들마다 세상의 풍경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서, 한참 후에 뒤돌아보면 지금은 전혀 그럴듯하지 못하게 여겨지는 생각을 예전엔 정말 온 정성을 다해 신봉했었다는 걸 깨닫고 웃음을 흘리게 된다. 그러나 그 옛날의 어리석은 생각이 없었다면 오늘의 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록 나의 글이 앞에서 말한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궁금해서 이것저것 뒤지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 풀이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면 나는 위안을 얻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그들과의 반향 관계는 그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반향 관계에 투영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문학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교육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시 이해의 상태에 절망하는 한편 그이들의 문학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열정에 크게 감명을 받은 적이 여러 번이다. 또한 그이들에게 문학을 안내하는 온갖 참조문헌들 안에 기술된 내용에 대한 놀람의 빈도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더 복잡한 사정까지 포함해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그래도 내가 교육대학원 수업을 지속하는 게 바른 일이며 선생님들에게 계속 말을 건네야 한다고 판단한다. 지금 당장의 나의 기룬 이들은 바로 그런 교사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나는 그이들이 이해할 수 있길 바라며 이 글을 썼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할 수 있을까? 내 희망이 말 그대로 희망사항의 수준인지 어떤지 언제든 어디서든 의견을 부탁하는 바이다. (『현대시』 201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