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혜진의 『너라는 생활』 본문
※ 이 글은 '동인문학상' 2021년 1월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나간 것이다. 조선일보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싣는다.
소설집, 『너라는 생활』은 너와 나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단편들은 거의 엇비슷한 형국을 이룬다. 이 작품들의 인물들은 상황에 휩쓸리는 연약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인물들은 거기에 나름의 반응을 하는데 ‘너’와 ‘나’의 반응의 강도가 다르다. 대체로 ‘너’는 좀 더 세고 급한 편이고 ‘나’는 좀 더 유보적이다. 이로부터 세 개의 시간차가 발생한다. 상황은 언제나 인물들을 앞서 나간다 ‘너’의 시간은 ‘나’의 시간을 앞서지만 상황의 시간에 부딪쳐 좌절하기 일쑤다. ‘나’의 시간은 가장 느리고, 그래서 상황을 시야에 담을 수는 있는데, 그러나 상황과 ‘너’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무기력하다. 이 시간차 때문에 이 작품들의 세 인물(상황까지 포함하여)은 잘못 끼워진 마분지처럼 아무런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덜렁거린다. 하지만 김혜진 소설의 강점은 이 덜렁거리는 구도 내부의 섬세한 움직임을 포착하여 마음의 이랑을 그리는 솜씨에 있다. 작가는 각 인물들의 마음과 동작 하나하나에 곡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면서 그 결들을 촘촘히 복원해낸다. 때문에 전체의 구도 내에서 보면 두 인물의 허둥지둥은 무의미의 반복적 추락이지만, 각각의 내부에서 보면 생명 운동의 임계치에 다다른다. 독자는 그 사이에 일어나는 어긋남의 인식과 긴장의 느낌 모두를 애틋하게 느낄 것이다. 이때 종래에 상황과 인물들 사이의 어긋남을 증거하던 시간차의 여백은 독자의 생각의 포자들이 날아들어가는 정원으로 변모한다. 다만 그 구도가 작고 한결같기 때문에 생각의 경계도 좁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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