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권여선의 『비자나무 숲』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권여선의 『비자나무 숲』

비평쟁이 괴리 2013. 4. 29. 04:27

권여선의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 2013)을 읽다가 문득 생각난 루카치의 문장 하나:

 

"비극은 하나의 놀이이다 ......신이 구경하는 놀이이다. 신은 단지 관객일 뿐, 배우들(인간)의 대사와 움직임에 결코 끼어들지 않는다. " 비극의 형이상학, in 영혼과 형식

 

그런데 그의 소설들은 비극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거기엔 삶의 몸부림이 있다. 절망 뒤의 분발이, 굴종 뒤의 항의가, 체념 뒤의 자학이 운명을 쥐어뜯으며 발버둥한다. 물론 그 몸부림이 할 수 있는 건, 인생이라는 링의 로프를 조금 바깥으로 늘렸다가 다시 안으로 튕겨지게끔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언젠가, 마닐라 삼으로 꼬았다 한들, 그 로프가 끊어질 날도 오지 않을까? 그래서 허망하고 싶지 않은 헛웃음이 있고, 터져 나가고 싶은 좁다란 여유도 있다.

작가는 하지만 나중에 오는 건 비극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로프가 끊어지면 이젠 투사들이 튕겨져 나가 허무의 암흑물질의 늪 속으로 익사하고 말 광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무슨 상징처럼 그려보이는 듯하다. 그의 비극은 재앙처럼 닥친다. 느닷없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절멸(絶滅)적으로. 그러나 온다기보다 차라리 멀어져가는 게 아닌가? 아슬아슬하게 닥칠 듯한 예감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듯한 떨림으로 울고 있지 않는가? 그 다가옴과 멀어짐 사이에 놓여 있는 건 오직 두려움일 것인가?

그의 초창기 소설의 짙은 절망의 세계, 혹은 총체적 부정성의 세계는 이렇게 미묘한 불균일의 무늬를 갖게 되었다. 여전히 세계는 깜깜하지만, 까망 속의 새까만 알갱이들이 차드락차드락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러한 진화 속에서 배경 묘사와 마음의 움직임이 완벽히 공명하는 이런 구절도 씌어진다.

 

얇은 잡지를 깔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계단 좌우 폭이 좁아 마치 아동용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담배 연기는 건너편 건물의 자줏빛 기와지붕 쪽으로 날아갔다. 자줏빛 지붕 너머로 낡은 고층 아파트의 다닥다닥한 베란다가 보였다. 이 동네는 너무 낡고 남루해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담배를 꽁치 통조림 캔에 눌러 끄고 고개를 들었다. 아파트 너머 하늘은 언제나 희끄무레했다. 문득 하늘색, 살색, 이런 색깔들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색깔들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이름들이 사라졌다. 존재의 소멸보다 이름의 소멸이 왜 더 허무한 느낌을 줄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름이 사라지면 불러 애도할 무엇도 남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