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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산다’는 것의 의미- 최인훈의 『광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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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산다’는 것의 의미- 최인훈의 『광장』

비평쟁이 괴리 2024. 7. 15. 01:43

『광장』은 4.19와 함께 태어났다. 작가 스스로가 그 점을 명시하였다. 1960년 11월,『새벽』지에 그 작품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썼다. 
잘 알다시피 4.19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다. 한국인이 제 의지와 제 힘으로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최초의 역사(役事)였다. 4.19와 더불어 한국인은 시민으로서 살기 시작했다. 시민으로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1960년의 신진작가 최인훈이 감격적으로 토해 낸 “자유를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 자유를 살기 위해서 한국인에겐 꼭 에둘러 가야만 한 길이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인이 시민으로서 살기 위한 터전으로서의 정치사회구조, 즉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는 한국인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945년 종전과 더불어 홍두깨처럼 던져진 것이었다. 그걸 함석헌 선생은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말로 가리켰다. 이 뜻밖의 선물을 누릴 능력과 자격이 조선 사람에게 있는가? 오랜 피식민의 세월을 보낸 조선 사람들은 능력을 키울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가 없었다. 또한 일본이 망할 것이란 예측을 못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제에 저항하기보다는 시절 탓으로 돌리며 따르기 일쑤였다.
해방기의 식자들은 이 문제에 두 가지 처방을 내놓았다. 하나는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이 제출한 참회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태준의 「해방 전후」가 제시한 ‘봉합론’이었다. 채만식은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곡절을 상세히 고백하고 자기 세대의 역할을 포기하는 대신 젊은 세대에 희망을 걸었다. 이태준의 ‘봉합론’은 과거를 묻어두고 일단 조국 건설의 대의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채만식의 참회록은 진실했으나 직무 상실이라는 결과를 대가로 치렀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에게 기대하는 건 가능한 일인가? 그들이 순수하다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할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반면 이태준의 ‘봉합론’은 다분히 편의적이었다. 우선 저 조국건설의 청사진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대의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합의를 온당하게 도출해내려면 다시 능력과 자격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태준을 비롯한 꽤 많은 지식인들은 청사진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착각하고 강요하였다. 그의 작품이 비교적 호응을 받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 청사진이 오류투성이였음은 그로부터 40여 년 후에 드러나게 된다.
결국 해방공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던져진 질문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 두 강대 진영의 이데올로기의 싸움터로 돌변하게끔 한 근본 원인이다. 준비가 안 된 사람들에게 해방은 도둑처럼 몰래 왔을 뿐 아니라 동시에 ‘신임 총독들’처럼 저벅저벅 들이닥쳤던 것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바로 이 상황에서 출발한다. 이 상황을 통과해야만 민주 시민됨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1994년에 낸 장편, 『화두』를 면밀히 읽어 보면, 그가 이태준의 처방을 깊이 운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왜 해방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명징한 눈길이 포착한 광경은 출발선의 황폐함뿐이었다. 해방된 자유민의 사고를 이끌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와 이성적 기획이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온 이념적 원리들의 맹목적인 추수이고 강제적인 적용이었다. 확실한 언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은 오직 풍문들이었다. 모두가 자유라는 남쪽에서는 오로지 자기만의 자유를 누리는 밀실들로 무한 쪼개져 있었으며 모든 것을 인민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북쪽에선 마르크스의 정치론을 딴딴하게 경직화시킨 당의 교시를 무분별하고도 맹목적으로 수용한 조직원들의 발작적 발악만이 넘쳐 흘렀다. 풍문 속에 휩싸인 사람들에게서는 허위의식이 진리를 대신하였고, 남의 삶이 내 삶 복판에 빙의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 남는 게 있었다. 바로 민주공화국민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일제가 물러났을 때 조선 사람들은 왜 조선왕조로 복귀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이 근대적인 삶에 대해 충분히 학습하였고 또한 열렬히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주민들이 왕조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체득하려 애써 온 게 이미 반세기 이상이나 흘렀던 것이다. 굵직한 사건만 짚어 봐도 갑신정변(1884)과 ‘인내천’을 앞세운 동학혁명(1894), 갑오개혁(1894)은 그 형식과 목표는 달랐으나 기본적인 동인은 모두 인간 일반의 자주·평등과 근대적 생활 및 제도의 도입에 대한 각성과 열망이었다. 그 각성과 열망은 일제가 강점하고 있을 때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1919년의 3.1운동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조선인 자신의 언어를 뿌리내리기 위한 한글의 정립과 일상화를 위한 운동은 1921년 경부터 시작되어 1950년대 말까지 쉼없이 이어져 70%를 넘어서던 문맹율을, 세계에 유례가 없게 거의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방 직후의 한반도민들은 전반적인 무기력 속에 놓인 것이 아니라 현실과 이상의 극단적인 분열 상태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폐허였으나 이상은 “꽃봉오리”(정현종)였다. 따라서 자격과 능력의 부재를 두고 무의미와 무가치를 곱씹는 것으로 끝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최인훈의 전 세대에 해당하는 손창섭의 『낙서족』과 「잉여인간」은 바로 정직한 세상 인식과 그 정직성 자체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아무리 세계대전의 종식이 덤으로 안겨 준 해방이었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 해방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어처구니없는 이웃상잔의 끝에 남는 것이 잉여적 삶에 대한 전적인 허무라 할지라도, “안전(眼前)에 전개”되었던 “신천지”의 소식은 여전히 소중하였다.
따라서 일말의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조차 최후의 구원을 위한 발심과 몸짓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였다. 살아낸다는 것은 세상을 바꿔 나간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산다는 것의 직무를 포기하지도 않고 또한 삶의 준칙처럼 주어지는 교범들에 맹목적으로 매달리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제 힘으로 제가 궁리하여 제가 세워 나갈 삶을 살아가려 하였다. 바로 그것이 ‘자유를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유를 살아낸 인물로서는 ‘이명준’이 한국소설사상 최초라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미 말했듯 근대적 인간에 대한 자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었다. 그러나 그 자각이 소설 속에서 한 인물의 몸 안에서 ‘권화’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령 흔히 한국 근대소설의 시초로 불리는 이광수의『무정』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근대인의 삶의 원리를 지득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 익혔다. 그래 놓고도 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자가 되어 타인들을 이끈다. 계몽가가 되는 것이다. 계몽가는 타인을 가르치려 한다. 타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도록 두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광수의 인물들은 스스로도 자유를 살아내지 않았으며 타인들에게도 살아내도록 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유를 산(生) 게 아니라 산(買) 것이었다. 반면 스스로 살아냄이 삶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삶의 형식 자체라는 걸 최초로 감지한 사람은 이상(李想)이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끼인” 그는 그 느낌을 실천으로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거듭 좌초하고 좌절하였다. 그의 ‘날개’는 오직 겨드랑이에서 간지러움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최인훈은 훗날 『크리스마스 캐럴』연작에서 이상의 겨드랑이의 가려움을 ‘가래톳’의 통증으로 변용한다.)
자유를 살아낸 인물은 그러니까 이명준이 처음이었다. 물론 그도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극단적인 분열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는 대신 끝까지 살아내려 하였다. 그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그의 옛친구 ‘태식’을 고문하는 장면이다. 6.25 전쟁 때 인민군 정보장교가 된 명준은 스파이 활동을 하다 잡혀 온 태식을 바로 풀어주려 하지 않고 구타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자신에게 납득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했기 때문이다.(이것이 친구를 몰래 풀어주는 이야기인 황순원의 「학」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물론 그는 결국 실패한다. 스스로 선택했지만 그가 선택한 이념은 그가 정말 납득하고 수긍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곳에서 자신의 자유를 살아보고자 온갖 몸부림을 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유로운 삶의 그 지난함을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모든 세계문학의 소설적 주인공의 진정한 문제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문학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정신분석 비평가 장 벨멩-노엘 교수는 단지 한 권 번역되었을 뿐인 최인훈의 소설에서 그의 문학의 특별한 가치를 간파해냈던 것이다(『충격과 교감』.) 
왜 소설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가? 현실이 소설보다 더 황당하고 충격적인 시대에. 동영상 문화가 문자문화의 독자들을 쌍끌이로 앗아가는 시대에. 스스로 살아낸다는 것의 모든 뜻과 양상과 방식들이 집약적으로 응축된 곳은 문학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추체험’의 방식으로 직접 겪게 하는 것은 소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소설의 문제성을 한국문학의 장에서 최초로 열어보인 게 바로 『광장』인 것이다. 그렇게 그 작품의 층이 두텁고 그 결이 섬세하며 그 내용이 찰지니, 그 의미를 거듭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이 189쇄나 찍게 되도록 꾸준히 읽히는 까닭이 맑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새까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