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진실의 부인이 진실을 향락하는 시대에서의 시(詩)의 사활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둘

진실의 부인이 진실을 향락하는 시대에서의 시(詩)의 사활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비평쟁이 괴리 2024. 7. 4. 13:39

시를 읽는 사람들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언론에서는 지난 해 말부터 현대시 100주년을 홍보하기 시작했고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주요 일간지들이 날마다 시를 연재하는 당찬 의욕을 보이긴 했지만, 실질적인 차원에서 얼마나한 효과를 내었을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물론 언론의 담당 기자들은 반응이 뜨거웠다고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내가 ‘실질적인’ 효과라고 말한 것은 이 요란한 행사들이 자아낼 팬시 상품적 효과가 아니라 시를 온몸으로, 다시 말해, 뜨거운 심신의 몸살로 체험하는 일의 크기를 뜻한다. 그 체험은, 사실 오늘날 시 향유의 문법 때문에 더욱 더 올 수 없게 되었다. 버려두자니 적막이요 보살피자니 가짜가 되는 궁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는 오늘날 시가 존재하는 양식을 독하게 보여준다. 시는 죽었다. 그것은 “신은 죽었다”는 외침과 거의 동의어이다. 1980년대 한국시를 흥성케 한 근본적인 원인은 시가 진실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의 절정에 6월 항쟁이 있었다. 그리고 항쟁으로부터 대통령 직접선거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정보화사회의 도래와 문화산업의 창궐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이 도래하였다. 그렇게 해서 진실은 이 사건들에 의해 삼켜져 소멸하였다. 그와 더불어 시도 카피들이 대체해 버렸다. 
심보선은 이러한 역사적 사태의 증언자이다. 그는 말한다. “두 가지 사건만이 있다 / 하나는 가능성 / 다른 하나는 무(無.).” 이것은 시인이 선악이분법에 사로잡힌 가짜 예언자임을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진리의 유일무이한 사건이 저마다 진리를 자처하는 사건들에 의해 찬탈된 이 광경을 두고 이렇게 단호히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이 사태는 기념비적 장관이 되고야 만다. 진실의 부인이 희희낙락하는 시절이 오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거듭 부정하는 것이다. “깃발, 조국, 사창가, 유년의 골목길 /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고 쐐기 박아야 하며,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딸들 /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고 손사래를 쳐야만 한다. 
그러나 이 부정의 일방성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투정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부정의 정신을 끌고 가되, 현실의 경계 너머로 달아나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한 복판 속에 그것을 심는 방식으로 끌고 가야 한다. 옛 시인들도 그 방법을 깨닫고 있었다. 김수영은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라고 했고, 김지하는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시인은 여기에서 ‘아니면’을 제거해 버린다. 정확하게 말해, ‘아니면’의 가능성을 없애 버린다. 왜? 오늘의 사태들이 그 가능성을 미리 없앴기 때문이다. 해탈도 자살도 오로지 현실 한 복판에서 향락되는 방식으로 실현되는 방법론을 체득함으로써 완전한 돌연변이에 성공한 것이다. 해탈은 판타지가 되었고 자살은 게임, (자살 방법들의) 흥정, 혹은 굿판이 되었다. 실로 “알레르기가 종교를 능가하는 시대라서 / 파멸과 구원이 참 용이해”진 것이다. 그러니 풍자만이 남을 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은 마냥 풍자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 해탈과 자살도 이토록 진화했을진대. 낡은 풍자는 그저 “내 귀 언저리를 맴돌며, 웅웅거리”는 “살아있음”의 소문만을 전할 뿐이다.
그러니 시인은 ‘풍자’의 축에 꽤 많은 풍자의 일가친척들을, 장수들을 모으듯. 끌어 모은다. 왜 풍자뿐이랴. 연민도 있는데. 해학도 있고 골계도 있는데. 야유도 있고 때로 비애도 있는데. 다만 생존의 전략이자 대결의 방책인 이 온갖 시초(詩抄)들은 제각각 떨어져서는 매우 자멸적이다. 풍자는 풍문이 될 수 있고 골계는 간살이 될 수 있으며 해학은 해찰이, 야유는 자조가, 연민은 엄살이, 비애는 비굴이, 욕설은 배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심보선 시의 풍자네 친척들은 그 다양성도 다양성이지만 모였다는 사실로 의미심장하다. 이 일족은 그렇게 모여서, 대동단결하기보다는 매우 불화가 심해, 연민이 풍자를, 해학이 야유를, 혹은 욕설을 골계가 통제하면서 상대방의 에너지가 최적의 저항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한 몫을 저마다 떠맡는 것이다. 가령, “시대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람은 바람의 지경을 꿈꾸고, 바람은 사람의 치욕을 가꾸”는 사태에 이르게끔 하기 일쑤라서, 시인의 ‘묵묵’이 초월에게 “아주 먼 데서 머리에 검은 띠를 두르고 묶고, 장거리주자처럼 달려오거라”고 충고하는 것이니, 그렇게 치욕으로의 회로를 단락(短絡)시켜 각성의 전류 쪽으로 돌려서 바람의 지경을 계속 “가꾸”게끔 하고자 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심보선 시의 마지막 무대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굴종과 죽음에 맞서는 이 시대의 모든 언행들을 저마다 새된 소리기둥들로서 현실의 한 복판에 서 있게끔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진실을 희롱하는 현실에도 저항하고 진실의 변질에도 저항케 해, 거듭 진실의 최종적 가능성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 책』[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제 360호, , 2008.07)